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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성전

by 광규김

사람의 존귀함은 오직 신념의 영역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구분지으며 계층적 폭력을 조장하는 것 역시 신념의 영역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종교는 세계관이었다.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 곧 종교 였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세상의 원리와 이치에 대해서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것은 때로는 논리적으로 보였고 때로는 광신을 필요로하며 지배자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종교가 그릇된 방식으로 쓰임 받을 땐 항상 지배와 폭력에 연관이 되어있었다. 어떤 연유로라도 둘중 하나를 옹립하는 위치에 있는 종교는 피를 보게 했다.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고서 지배의 논리를 옹호하기 위해 존재한 순간부터 종교는 타락의 길을 걸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 본연의 길이란 세계를 설명하고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오랜시간 종교는 사랑과 지배를 이야기 했다. 누군가에겐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써 사용되어 지배층의 논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럴 경우 종교는 제의적 행사에 치중하게 되며, 제의를 드리는 자들에 대한 권력을 용인했고, 세상이 그들의 것이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 아래 전쟁을 일으켰고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나 오랜시간 사랑을 이야기한 종교가 있었다. 이들은 철학이 되어 세대를 지나도 살아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에 울림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기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를 존귀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는 자기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역사 속에서 발전을해나갔다. 그들은 제의보다 실천을 강조했으며 예배보다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 신앙의 변천사로도 볼 수 있다. 그 신앙이 어떤 식으로 민족을 결집했으며 국가를 움직였고 때로는 국가를 응집시키다가도 권력에 대항하여 견제하는 세력이 되었는지를 지켜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유대교가 되었고 기독교가 되었다.


예언자가 세계관을 설명하며 이웃에 가치를 부여하고, 고아와 과부의 편에서 싸울때 종교는 권력을 견제하고 강한 윤리적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종교가 성전에 박혀서 제사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왕의 지배의 도구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대변자가 되었을때 종교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부패했다.


그러다 성전이 무너지고 여호와 신앙의 두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진다. 이제 율법만이 남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사상과 가치가 남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세대와 세대를 건너 전해진다. 그것이 말씀 중심의 종교였고 공동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종교라 말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예배는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제의는 종교인을 결집시키며 영광을 돌릴뿐 본질과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종교가 다시한번 권력과 붙어먹으면서 제의를 중심으로 모이는 종교가 되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서 공존하고 있다.


말씀을 중심으로 모일 것인가. 성전을 중심으로 모일 것이가. 이것은 여호와 신앙에 있어 중요한 논쟁거리였고 지금도 이어지는 문제가 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중심으로 권력자를 견제하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논리를 전할 것인가.


아니면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 제의적 행사에 자신의 신앙이 가진 물음과 위기의식을 안정 시키며 눈을 가리고 권력의 편에 서기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도 여호와를 믿는 신앙은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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