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성전을 주관하는 전쟁의 신이었으며 그들 민족의 대변자이자 보호자로서 존재한다 믿어졌다. 이로써 그들의 선민의식은 가속화 되었고, 여호와는 사막신 혹은 민족의 신으로 격하되었다.
그들이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가나안 사람들을 어른부터 아이까지 도륙내고 있을 때에 그들이 말하던 "샬롬"이 팍스 로마나보다 선한 것이 있고, 그리스 도시국가의 평화 에이레네보다 우수한 것이 있었을까?
예수의 시대가 되어 그는 평강의 왕이 되었고, 민족의 신으로서의 여호와를 거부했다. 사도들은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했으며, 민족을 넘어선 거대한 신앙 공동체가 세상에 태어나는 중이었다.
진리는 태생적으로 배타적인 단어다. 타자와의 양립을 거부하는 진리는 확고한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진리는 거부되며 해석의 다양성으로 사람들은 평화와 진리에 접근하고 있다.
종교가 폭력을 야기하던 시대에서 진리란 소수를 위한 것이었으나 결코 소수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가 평화를 말하던 시기에는 어땠을까? 그들은 객과 고아와 과부의 편이었고 죄인들의 친구였다.
종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여야했던 이방인에서 사랑해야할 이웃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계기는 오직 십자가의 대속 한번으로 족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던 예수는 비폭력 무저항으로써 로마의 평화에 대응했고, 황제의 평화를 반박했다. 그리고 그순간 부정당한 유대의 샬롬은 성자를 죽이고도 그를 부정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종교는 이념 처럼 광기를 부를 수 있다.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진리 앞에서 겸손해야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끝없는 배타성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이타적이었고, 죽이기 보다 대신 죽임을 당함을 선택했다.
무지의 시대에서 역사는 폭력을 용인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지식이 더해져도 여전히 종교가 폭력성을 야기할때가 있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신앙의 핵심은 그의 의와 공도를 행함에 있었다. 정의에 신실함이 왕조를 세움과 전쟁에 이김보다 중요시 되었고, 약자를 사랑함이 제사와 헌신보다 중요시 되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전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어떤 의무를 지겠는가? 적어도 가나안 정복의 재반복은 아니지 않겠는가?
로마의 평화 곧 황제의 복음보다 바리새와 제사장의 신실함보다 선한 것은 어디서 나오겠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해답보다 나은 것은 2천년이 지나도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