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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와 종말에 대한 이해

나의 신앙 개관

by 광규김

인간은 영생을 탐했기에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

근원적으로 그들은 신의 명령을 어겼으며, 그것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였다.

신은 인간이 영생마저 얻지 못하려 하기 위해 그들을 동산 밖으로 추방하고 동산을 봉인했다.

성경은 이해하기를 태초의 인간은 선과악을 알지 못했다. 느끼는대로 받아들였고 신 앞에서 숨지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그들로 낙원에 머물게 했다. 판단하지 않았을 뿐 그들에게는 일말의 죄도 없었을까?


선악에 대한 개념이 생기자 인간은 가장 먼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가렸다. 신이 용인한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이 아름답게 지은 그 모습 그대로는 부족함이 있으나 애써 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이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 내재된 근원적 죄로서 신의 판단을 배제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이 숨은 후 신은 직접 동산을 거닐며 남자와 여자를 찾으셨다고 나온다. 이는 즉 벌거벗은 모습으로 대면하여도 신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족함과 부끄러움이 만연한 그 모습이어도 신은 인간을 만나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신의 창조와 판단을 인간 스스로가 부정하게 되었다.


때문에 신이 정하다한 것을 인간이 수치로 여겨 숨기고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신은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아름답다 여겼으며 낙원에 지내기를 용납하였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닌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되었음은 최대의 비극이었다. 완전하지 않은 존재의 판단은 역시 완전할 수 없었고, 인간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며, 선과악은 판단하나 완전한 선에도 완전한 무지에도 이를 수 없었음을 의미했다.


때문에 율법은 선이 무엇인지 알게하였고 그들의 판단에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들로하여금 악이 아닌 선에 머물게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규범으로서 다시한번 심판은 오직 신의 영역인 것임을 알게했다.


성자의 성육신은 신이 생각하는 정결함의 기준과 심판의 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음을 재차 확인시켰다.


신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던 생명 나무의 영생은 그를 믿음으로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의 세상에서 해골의 언덕 위에 세워진 그것이 인간의 생명나무가 되었다.


어긋난 인간의 재판과 장로 유전에 의한 율법의 한계를 명시하며 인간이 심판하는 선악으로는 결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음을 그가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쳐왔다.


이로써 문화 명령때 받은 인간의 다스림은 세상의 선악은 인간이 판단할 것이 아니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다스리는 동안 세상은 무너진 공의 속에 심판 받았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요한과 공생애를 시작한 성자로부터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 가까이 왔다”는 완전한 신 그리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왕좌에 오를 심판자로인해 신과 인간의 합작품이 되어야했던 다스림이 완전히 회복될 것임이 선포된다.


회개는 심판의 주체가 신만이 유일한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이었고 다시한번 신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언약의 회복이었다.


나라가 임할 것은 창조로부터 어긋난 다스림이 신이 심판하는 완전한 정의와 공으로 회복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의인과 가난한자에게 위로와 복된 소식이 되었다. 이것은 이전 절서에 대한 명백한 종말이었으나 또한 완전한 회복이면서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회개는 이전의 길에서 돌이켜 신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아담과 하와는 그러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한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신의 품에 안길 수 있게됨을 의미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종말의 긴장관계 속에서 종말 이미 임한 것이 되었다. 돌이킴은 선악의 심판과 세상의 다스림이 신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고 그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 왕의 계명에 따라 살게 됨으로써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추방된 탕자는 다시 자녀가 되어 신이 다스리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


판단은 선택을 만들고 선택은 책임으로 이어진다. 선악의 판단과 삶이 선택을 다시금 신께로 돌리는 것은 신이 판단한 길로 걸어감으로 세상은 다시금 신의 책임 아래로 들어감을 의미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그것을 신이 다시한번 홀로 떠안았다.


성자는 재림하지 않은채로 역사는 이어지나 성자를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역사는 구원이라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 신의 창조로 열린 세상은 신의 구원으로 종말하게 되며 그것이 얼마나 팽창하고 이어지는가에 상관 없이 이미 심판과 구원이라는 종말점 앞에 서게된다. 때문에 모든 역사는 매순간 종말 앞에 서게 되며 그 긴장감 속에 신의 나라는 다가온다.


죽음이라는 종말이라는 끝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개인과 세상의 이야기는 그것이 신의 책임으로 돌아감으로서 구원 받는다. 그 끝이 부활과 영생 그리고 그의 나라로 이어져 완전히 새로운 그러나 이전의 것이 완전히 회복된 이야기로 끝맺음 되기 때문이다. 이 끝맺음은 마침표로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이어지며 신의 사랑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으로 신은 알파와 오메가 곧 시작과 끝이 됨으로 모든것이 되고 모든 것이 된 그의 품 안에 세상이 안기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 즉 그리스도가 진리임을 믿는 이들의 세상에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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