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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규김 May 01. 2022

고대의 기복

신명기적 신학이 제국의 폭력 앞에 짓밟히기 전까지 유대 사회에 팽배해있던 기복주의적이며 낙관론적 시각은 여호와 신앙의 중심 기조로 작동하고 있었다.


다윗왕조의 몰락과 성전의 붕괴는 역사를 조명하는 유대의 신학에 근원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예언자마저 침묵시켜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느웨 조차 해냈던 회개를 하지 않은채 선민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지고 개처럼 타국으로 이끌려 들어간 이후였다.


이때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고대 근동 종교의 영향을 받은 유대의 신학은 보다 이분법적으로 분단된 세계 이해를 가지게 된것으로 보인다. 제국은 문화의 용광로였음으로 멸망의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대민족에게 세련된 제국의 종교와 신학은 지난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들로서 검토되었을 것이다.


고레스의 칙령은 신화의 시대가 끝나 보다 성숙해진 시민들에겐 더이상 모세와 같은 구원자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돌아갈 것을 허락 받았을 뿐이었기에 왕조의 재건은 불가능했다. 메소포타미아의 패자들에겐 10가지 심판은 내려지지 않았고 이전과 같은 해방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안티오코스 박해에 대항하여 일어난 막가비 혁명 같은 적극적인 움직임도 있으나 이후로 이어진 유대교 종파 분립을 통하여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처한 상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외부의 손에 빌붙어 수동적 구원을 기다리게 된것으로 사료된다.


이후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기까지 신의 침묵은 계속 되었다. 숫한 묵시적 서적이 나오고 종말론적 신앙이 대두 되었으나 유대의 묵시적 소망은 마사다에서 자결했고, 바르코흐바 때의 발악 이후로는 랍비의 문헌에서마저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소속집단에 대한 낙관적 시각은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기복주의적 신학은 폭발적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그 한계가 명확한 것이 밝혀졌다. 때문에 예수는 종말이라는 명백한 선을 그어놓고 율법의 완성이 되었다.


제국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공생애는 유대전쟁으로 억눌려왔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인 1세기 초기 시대에 자리하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짐승이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의 이름이 담긴 깃발에 세겨져 성문 밖으로 다가올때 도망하고 목숨을 구걸한 이들 외에는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몰살 당했다. 얌니아로 도망한 바리새는 랍비 유대교가 되었고, 펠레로 도망한 이들은 기독교의 조상이 되었다.


극도의 무력함과 절망 속에 피어난 꽃인 종말론이 신이 계시다는 확고한 고백보다 신이 계셔야만한다는 절규로 들리는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여전히 자본과 시장 논리에 대한 무비판적 낙관론을 지향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보수를 표방하고 있으나 여호와 신앙의 근본과는 무관한 비본질적 신앙이 있다. 몰락하고 있는 교세와 양극화가 극단화된 사회에서 그들은 가라앉는 방주에 올라탄채로 문을 걸어잠그고 끝을 맞이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회복에 목적을 두고 있는한 우리는 결코 예수의 여정에 동행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기 때문에 다윗 왕조의 재건을 꿈꾸던 유대민족 처럼 부흥을 가져올 예수의 이름에 심취해 그곳에서 잠겨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회귀해야할 과거에 묶여있는한 예수가 가져올 미래를 부정하게 된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라 우리는 종말 속에 구원이라는 소망을 품은 작은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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