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에서 난다
사실 몇 권 읽지도 않은 신학 서적의 말이 그럴싸해서 그 내용 그대로 믿어버리는 것도 이전까지의 것들 만큼 맹목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때 자극적인 신학 곧 보다 이전 체계를 뒤집고 부정하는 식의 신학만을 쫓으며 공부했던 결과 오히려 얕은 생각을 추종하며 살았었다.
신학적 성찰을 통해 윤리적 숙고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현대 윤리에 짜 맞추기 위한 전통의 부정을 시작한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거대한 흐름 앞에 극단적 해체주의와 다원적 윤리에 다다른 이들은 옳음을 추구하나 기준이 없는 오히려 무지몽매한 상태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대개 사조 혹은 시대정신의 문제 해결은 그 이전 시대의 정신적 흐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로 우리는 다시 한번 계승과 개혁이라는 것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신학과 신앙고백들은 대개 그것들이 나온 시점의 시대적 배경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까닭 없이 나온 것은 없기 때문에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그런 신학이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단계를 거치며 신학은 발전했기 때문에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신학을 시도하려 하여도 이전 시대 신학의 맥락을 잃는다면 이성적으로 보이는 반지성적인 주장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해체가 만연한 현시점에서 오히려 많은 이들이 본질에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 있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비판적 성찰은 지난 시대의 것에만 향해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한 것들. 다시 말해 지금 내게 짐짓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 더욱 강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당연했던 것처럼 지금 내게 당연한 것 역시 이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비합리적인 생각으로 비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신학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때 거장이라 불렸던 대가들도 비판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념이 고착되면 편향의 늪에 빠진다. 현대 지식에 기반한 가치체계 역시 다원과 해체를 기반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선적으로 변모할 수 있음은 이런 이유에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고착된 이들은 대개 자신들만의 어휘를 창조하며 접근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스스로 고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성과 논리적 비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외부의 목소리를 공격으로 치부하고 독단적인 자세를 취하며 상대의 의견을 폄훼한다.
글이 길어졌다. 요지는 이렇다. 지금 한창 유행을 타고 있는, 계몽적으로 보이는 사조는 얕은 지식으로 깊은 체하며 모종의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모럴 포르노 같은 자극과 자기 고양감에 도취되어 지성의 최소한의 조건인 자기 객관화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
이때 지금 내가 지적 허영심에 빠져버린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배우는 자의 첫 번째 자세는 언제나 겸손함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