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더 사랑하는 자가 을이 되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랬다.
더 사랑하는 이가 희생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랬다.
우리는 살아가며 가득 채워진 사랑을 조금씩 소비한다. 그것을 연료로 인격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인생의 대부분의 사랑은 주로 인생의 초반부에서 받은 부모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부모가 곁에 없다면 자신은 더 이상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갚지 못한 사랑과 표현하지 못한 감사가 끝내 마음에 남는다.
더 이상 나를 세상에 있게 한 그 사랑을 받을 수 없고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가슴을 저미는 미안함이 그 빈자리에 남아 이제 받았던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자식이 떠나간 부모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를 잃게 된다.
그저 건강히 살아있어 주기만 바랬던 이를 잃고 더 이상 사랑을 줄 수 없게 된다.
자식은 받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끝내 갚지 못한 은혜에 마음 아파하지만
부모는 여전히 자식을 사랑하며, 자신의 전부로 사랑을 채워줄 아이를 잃고서 그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망하게 그리고 무겁게 그 자리에 눌러앉는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그렇듯 받은 사랑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계속 살아가야겠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식에게 받을 사랑도 없으면서 다만 자식을 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 전부를 잃는다. 그들은 자식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없으면서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간다.
나보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던 이보다
나보다 소중했던 이를 잃는 아픔이 더욱 처참한 이유는 왜일까
사랑은 받지 못함보다 주지 못함이 더 비극인 것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은 누군가의 사랑으로 살아왔음에도 자신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할 누군가가 없음이 더욱 비참한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해도 나는 받은 사랑으로 살 수 있으나
내 안에 있던 누군가를 향하던 거대한 사랑이 그 자리에 짐이 되어 주저앉아버린 것은 사람의 가슴으로는 짊어질 수 없는 가혹한 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떠난 자식은 홀연한 발걸음이 되어 돌아갈 곳이 있는 여정을 떠날 수 있지만
자식을 보낸 부모는 텅 빈 집이 되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물로서 죽어가야 한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남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남은 인생을 죽어간다
부모에게 돌아간 자식은 다시 살아갈 수단을 얻은 것이지만
자식을 되찾은 부모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얻은 것이다.
참으로 이 사랑은 서로에게 유익한 것이다.
사랑을 받으면 살아갈 용기를 얻고
사랑을 주면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사랑은 살아있는 까닭이 되며, 사랑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떠나간 자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이며
돌아갈 집이 있게 때문에 우리의 세상에는 끝이 존재한다.
우리가 있기에 아버지는 세상을 지으셨고 아버지가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의 두려움을 붙잡지 않고서 흘려보내며 늙어갈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역사는 결국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역사마저도 종말을 가져오신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