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과 기다림
1.
현실이 불의할 때 2024년의 대림절을 맞았다.
거대한 폭력이 유치한 자의 손에 쥐어졌고, 맹목적인 사람들은 신앙처럼 이를 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소위 ‘보수’ 혹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인들이 민주주의를 허망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독재에 찬성표를 던졌단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탄핵하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일어나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에 맞섰을 때, 역시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반대표를 던지며 기도하자 말했다.
이런 시기에 ‘예배의 자리를 지키자’ 따위의 허탄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뭘까?
아마 그들은 평생 들어온 그대로 신앙하고, 평생 보아온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았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취해있었고,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창세 이전부터 예정된 구원’ 따위의 값싼 사설에 넘어가 메시아 예수의 삶과 철학은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 행위로 구원의 확신을 누리려 했기 때문에 스스로 이야기하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모순되이 가르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종교행위에서 성도의 자질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경건은 종교성만 확보된 텅 빈 껍질일 뿐이었다.
그 과실 안에는 아무런 과육과 씨앗이 없었고, 얇은 껍질 안에는 똬리를 틀고 있는 끔찍한 이기심만이 가득했다. 그들은 내세를 믿었기 때문에 예배를 강조했고, 내세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자랑했다. 그러나 금싸라기 땅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어진 개신교 종교시설은 그들이 얼마나 배타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또한 사특했는지를 방증했다.
그들은 타자를 보며 말뿐인 사람이라, 표리가 다른 정의감에 도취한 사람이라 정죄했다. 그러나 예배뿐인 신앙인과 기도뿐인 신앙인만큼 역겨운 것이 없음을 그들은 스스로 눈과 귀를 닫고 모른 체했다.
어째서 한국 개신교가 이토록 모순적인 사이비 집단으로 전락했는가? 미국 근본주의가 뿌려놓은 역병 같은 값싼 은혜를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였고, 이것을 다시 질병처럼 퍼뜨려서 거짓된 경건에 독한 술을 마신 듯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취기를 진하게 유지하기 위해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칭송했고 이로써 개혁을 역행하며 중세의 면죄부 같은 헛된 예배를 하늘로 올렸다.
2.
사회의 질병은 교회와 무관한가? 여호와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대를 심판할 때 그들의 신앙이 온전히 엇나갔음을 지적했다. 여호와 예언자는 삶과 신앙을 분리하지 않았고, 율법은 생활의 자잘한 영역까지 자의가 아닌 신율에 먼저 귀를 기울일 것은 요구했다. 예언은 신앙인의 변질과 종교지도자의 타락을 먼저 지적했다. 야곱의 자손들 사이에서 예언자가 외치며 돌아다녔건만, 교회는 말씀을 가지고서 그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정죄하는 데 사용했다.
그들은 동성애를 향하여서는 죽기를 불사하고 맞서려 했지만, 간통죄에 대하여서는 끝까지 침묵했다. 간통죄가 폐지된 2015년에서 7년이 지난 2024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의 총회장은 교회 권사와 무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되었고, ‘목회상담’이었다는 아무도 믿지 못할 추한 변명을 지껄였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라면, 이 대림절은 눈물로 보내야 한다. 재와 티끌이 저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자보다 이 개신교인들에게 더 가까이 있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누구를 기다리며, 누구의 탄생을 기념하는가? 예수라 이름 붙인 바알에게 절하는 세대여. 이 계절에 강단에 둘러놓은 보라색 휘장은 왕권이 아닌 죽음을 상징해야 할 것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순수성을 위한 장례를 치르고, 우리의 죽어버린 경건과 신앙에 대하여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며, 소멸해야 마땅한 종교집단이다. 교묘하게 다른 것이 사이비이며, 정도에서 벗어나 다른 끝을 향한다면 이단이다. 신앙인이 바랄 소원의 결국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있는 내세뿐이라면 우리는 이단일 것이며, 멋들어지게 지어놓은 건물 안에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만 남아있다면 우리는 사이비일 것이다.
자를 수 없는 폐부는 악취와 함께 불살라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도려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온전히 태워 없애야 한다. 이 악취는 하늘에 올려질 향기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차게 식은 재를 질식하도록 머리에 뒤집어쓰고, 차마 우러를 수 없는 하늘을 등지고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로 하염없이 울어야 한다. 우리가 전능자의 자녀를 자처하다 나약한 욕망에 영혼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3.
그렇다 하면 소망이 정녕 없는가? 나는 갈피 잃은 분노를 표출하고자 글을 적지 않았다. 진정 바랄 것이 교회가 망하는 일이라면 이런 수고를 들일 이유도 없다. 물가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원수는 알아서 떠내려올 것인데 내가 미움이란 감정을 심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교회를 미워하는가?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미워할 수 없다. 내 말은 먼저는 나를 향한 자책의 칼이 될 것이다. 내가 정녕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남는 것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죽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여야만 하고, 먼저 죽어 희생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내가 되길 바란다.
대림절은 성탄을 기념하며,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대림절은 평생을 향해 확장할 필요가 있으며, 성도의 삶은 그 자체로 기념과 기다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되는 예수의 거룩한 삶과 가르침일 것이며, 기다림은 현실의 불의가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깨어짐을 불사하는 소망일 것이다.
구조적인 악 앞에서 이웃과 후대를 위해 싸우는 것이 기다림이며, 무의식에 자리 잡아 인식을 구부리는 문화와 내면에게 무릎 꿇지 않는 저항이 우리의 기다림이 될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예수께 배웠고, 성경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교회를 일으키고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안에 우리의 삶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이 새로움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선한 능력일 것이며, 끝까지 기대하고 소망케 하는 능력 그 자체일 것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가장 어두운 밤에도 감춰지지 않고 빛나는 법이다. 하늘 아래 땅이 어두울지언정 검은 구름 위로 별들은 영영토록 빛난다.
권세자의 손바닥은 세상에서 빛나는 마을을 감출 수 없고, 많은 이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이들은 별처럼 영영토록 빛날 것인데, 우리가 모여 마을을 이루는 것이 교회이며 선한 공동체일 것이다.
권위와 재력이 아닌 선의와 나눔으로 얻는 세상. 화석화된 종교행위가 아닌 살아있는 자들이 뒤따르는 선의로 지켜지는 세상. 내가 바라는 세상은 내 언어 안에 새로이 발명된 것이 아니며,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바라고 따르던 세상일 뿐이다.
참으로 뻔한 것이고, 참으로 흔하게 듣던 이것을 진실로 바란다면 그는 날로 새로울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새로울 것이 없으나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나날은 늘 새로울 것이다. 그 새로움을 우리는 예로부터 생명이라 말했으며 삶이라 말했다. 영원토록 새로운 나날을 소망하며,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사랑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소망은 거창하다가 다시 소박해진다. 이 순간에 사랑하는 것. 그 이상을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