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는 원수 사랑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나의 사랑은 배타적 사랑이 아니다.
나는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를 사랑하면서 영국인을 미워할 수는 없다 .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방식이 전 반적으로 나의 비위에 맞기 때문에 그들만 사랑한다면,
그들의 방법이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사실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
그때 는 바로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에 기초한 사랑은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일 이나 다름없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진리에 대한 헌신은 곧 삶의 전 영역에 관여하길 요구한다 말했고, 결국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에 카렌 암스트롱은 이에 대하여 종교가 정치가 무관하다는 주장은 종교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것이란 문장을 남깁니다. 종교는 그 자체로 폭력성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여러 폭력의 좋은 구실이 됩니다. 그렇다하여, 종교가 소극적이게 된다면 본디 종교가 말해야 하는 가치판단의 영역이 축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구요?
더이상 종교가 하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 자체로 공허하기 때문에 살아숨쉬는 진리는
더이상 그들이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하여 종교가 정치에 과몰입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종교는 특정 정치집단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인종과 문화간의 우열을 가리는데 사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영역에 비판이 이뤄졌고, 종교는 스스로 저지른 실수에 의해 그 권위가 해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야 맨발로 걸어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정의를 말합니다. 그 말하는 방식에 통치가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로 번역이 되어있지요. 교회가 제 기능을 한다면, 그 사회는 본디 사랑과 정의가 작동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뤄질까요?
곧 사람을 억누르는 옛된 권위를 해체하고, 모두를 위한 평탄한 길을 만들고자 힘쓰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념과 정치인을 숭배하길 거부하고, 그들이 사랑을 경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써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상보다 큰 사랑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채운 이들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