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은 죽어도 된다

오히려 끝에 닿으려면

by 광규김

[초심은 죽는다]

흔히들 초심을 지키라 말한다. 조금만 해이해져 있으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말한다. 나 역시 초심에 대한 환상 속에 발버둥 쳤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초심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열심히 하려는 강박은 되려 내게 칼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지켜주려 했던 초심은 나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초심이고 뭐고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쉬어가야 할 때가 필요하다. 헤엄을 치기 위해 계속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면 숨이 막혀 죽는다. 호흡을 차분하게 안배해야지 오히려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잘 갈 수 있다. 짧은 거리를 가기 위해서는 물속에 완전히 잠긴 채로 헤엄을 치면 빨리 도착하겠지만, 먼 거리를 갈 때 그런 식으로 하다간 빠져 죽는 수가 있다. 목적지만 잘 생각하면 된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가는 길에 계속 바뀔 수 있다. 열심히 가려고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아마추어는 언젠가 반드시 힘이 쭉 빠질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법이다.


[살기 위한 여유 부리기]

그렇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말은 더 이상 노력만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용기가 있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는 있지만 전쟁을 이기게 하는 건 치밀한 전략이었다. 산다는 일은 변화한다는 일이다. 변함을 마주하고 변함에 대처해야 한다. 당신의 마음도 계획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 그렇다고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을 책임져주지 않는 이들의 비아냥 속에 죽어갈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살기 위해서 여유를 부리기로 선택했다. 요양 생활을 하게 된 1년여간의 시간 동안 나는 공기 좋은 고향 땅에서 지내기로 했다. 틈이 날 때마다 공부를 하고 파트타임이나 봉사활동을 알아보던 이전의 나는 없었다.


[우울감을 감추기 위해 바빴을 뿐이야]

내가 나를 채찍질한 이유는 가만히 있으면 밀려오는 우울감과 외로움에 잠겨 숨을 쉬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안감에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혹사시켰던 이유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생각들이 나를 천천히 죽이려 하고 있음을 직감해서였다.


어느 순간 나를 ‘괴물 딱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어떤 후배는 나를 만나는 자리에 철저한 준비를 하고 나왔다 했었다. 그 준비가 뭐냐면 다양한 철학자와 신학자의 책을 읽고 오는 일이었다. 가볍게 차 한잔 하면서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선배에 대한 과대평가가 짙은 학과 특성도 있고, 내가 보여준 단면이 지나치게 열심히 살았던 모습이었는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후배님은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바쁘게 살았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괴로워서. 넉넉지 못한 형편에 상경해서 공부하며 꿈을 꾸는 일도 심해지는 우울증 증세를 견디기 위해 나를 채찍질하는 일도 결론적으론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고 꿈을 꾸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에 죽임 당하거나 스스로 죽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종착지에 닿기 위해서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살게 한 건 내려놓음이었다. 무게를 줄이고 주저앉아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다음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만약 이 말을 공감할 수 있는 당신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나는 너무 늦게 쉬진 않았으면 좋겠다 말하고 싶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여유를 부려야 할 순간이 온다. 멀리 가고 싶으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늑한 카페에 앉아 따뜻한 얼그레이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라 하고 싶다. 그날이 비가 오는 날이어도 좋다. 단조로울 것 같으면서도 특정 지을 수 없는 빗방울의 리듬을 귀로 들으며 호흡을 정리해보면 도움이 된다.


다 부질 없어지는 순간이 오기 전에, 혹여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지켜야 할 건 초심이 아니라 당신이며, 처음의 열정이 아니라 왜 그 길을 가고자 했는지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마저 바뀔 수 있지만 그동안의 난관을 헤쳐나가며 수많은 고민과 질문들 속에서 남겨진 단순한 문장과 단어가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사랑이었고 그것이 여전히 나를 살게 한다. 진정한 초심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당신이 애써 변론하지 않아도 더욱 굳쎄게 남아있는 정금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를 끝까지 가게 하는 것은 그곳까지 가면서도 곁에 남아있던 그런 동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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