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소식을 듣고 달려간 날 이후로 다시는 직장에 출근하지 못했다. 대학도 직장도 다 서울에서 시간을 보냈던 나는 결혼을 앞두고 직장도 다 그만두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따라 내려갔다. 그래서 주위엔 온통 남편과 함께 아는 지인들뿐이었다.
남편과의 온갖 추억과 발자국이 가득한 그곳에서 숨 쉬며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3개월쯤 3살 딸아이와 집도 없이 떠돌아다녔다. 친정으로, 사촌 집으로, 시댁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우리가 살던 집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3개월쯤 후에 이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이사준비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 집에 갔다. 모든 것이 멈춰있던 그곳. 시간도 그대로 멈춰있는 것 같은, 우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보내던 그 일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
그렇게 3개월을 보낸 뒤에야 친정과 사촌들이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 봄이 와 나는 예전 삶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롭던 남편이 아이를 등원시켜 주고, 친할머니가 하원 후에는 돌봐주시고 내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이를 보고,,, 그렇게 아이가 안정적으로 양육될 수 있었던 과거는 더 이상 없었다.
겨우 4살이 된 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에 갔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선생님들이 먹여주셨다. 하원 후에는 돌봄 선생님이 봐주셨다.
그러다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셔서 봄이를 당장 봐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어린이집에 남아있어야 했다. 이제 막 4살이 돼서 아직 한창 엄마아빠의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그 나이에 홀로 남아있을 봄이를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안 됐다.
자매를 데리러 오는 다른 엄마보다 한발 늦으면 봄이만 혼자 남아있었다. 데리고 오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 난 매일 새벽 1~2시에 깨어서 잠이 오질 않아서 날을 새고 출근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슬픔을 온몸으로 삭혀내면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던 나는 결국 몸은 만신창이가 돼있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1년이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세 번이나 입원신세를 져야 했고, 턱관절 장애로 1주일 두 번씩 일 년을 치료받아야만 했다. 턱이 흔들리고 허리 무릎이 아파서 2층 계단을 오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막 떨리고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는 공황장애라는 친구도 함께 했다.
이전에는 없던 알레르기도 생겨서 입원할 정도였다. 두드러기가 심하면 간지러운 게 아니라 아프다는 걸 이때 알았다. 두드러기가 심해서 간지러움을 넘어서 통증이 컸다. 하지만, 곤히 자고 있는 4살 딸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진통제로 하룻밤을 지새웠다.
동틀 무렵에서야 참지 못하고 결국 사촌언니를 호출해서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병원에 다녀왔지만, 결국 입원하게 됐다. 항생제 알레르기가 생긴 줄도 모르고 항생제를 계속 투여하다 보니 오히려 입원하고 나서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두드러기가 심해졌다.
일주일이면 내외 외과 치과를 몇 번씩 다니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출퇴근을 하며 일 년을 보냈다. 다행인 건 이사 오면서 새로 구한 직장이 그래도 한가한 편이고, 내 사정을 아셔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시간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더디게 느리게만 가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성폭행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25년도 참 기나긴 터널을 지나온 그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미 아픔으로 단련돼서 남편의 일을 겪고서도 만신창이인 몸으로 여자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오늘 하루도 아무 일 없이 내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감사함인지 잘 모르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봄이 아빠가 떠나고 코로나와 함께 보낸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 가족은 웃으며 다시 일상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