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용할 양식 Oct 11. 2020

1. 언제까지 농사가 짓고 싶을까요

“내가 오십 일 년에 돈암동에 정착해가지구, 사십 아홉 첫째 아들은 목동 살고, 사십 다섯 둘째는 자영업을 하는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갑자기, 이 대화는 1951년으로 순간이동 해버린 걸까 곱씹어봅니다. 시작은 저였어요. “혹시 오늘 수도관 공사 언제 끝나는지 아세요? 물이 안 나오네요.” 건너편 밭에 웅크리고 앉은 아저씨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합니다. “몰라요. 지금은 안 돼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 말하려던 찰나, “내가 오십 일 년에 돈암동에…”

네? 갑자기요? 제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멀뚱히 있는 사이, 내내 땅만 보며 비료를 뿌리던 아저씨는 고개를 들더니 슬쩍 말을 이어나갑니다. 순식간에 둘째 아들 연봉까지 알아버렸어요. 아저씨는 또 슬쩍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장갑을 벗습니다. 그건 마치 신호 같았어요. 아무래도 대서사의 막이 오를 참이라는 신호 말이죠. 하지만 오늘은 안 됩니다. 3월을 넘기면 안 될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하하! 그러시구나.” 걸음을 떼며 저도 슬쩍 이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돈암동 아저씨! 다음에 다시 등장해주세요. 이제 제 밭으로 건너가 볼까요. 

오늘은 3월 26일. 춘분을 6일 넘긴 날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춥고, 조금 걸으면 외투 지퍼를 열게 되는 날에 감자를 심기로 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땅,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은 두부 같습니다. 네모반듯한 땅이 편평하게 누워 있고, 누르면 누르는 대로 푹푹 꺼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얼었던 흙이 녹으며 살짝 부풀어 오릅니다. 포크나 삽으로 흙을 이리저리 뒤집어주면 흙뭉치 틈틈이 공기를 잔뜩 머금어 더 폭신폭신해집니다. 지금 제 마음도 그래요. 아, 햇볕은 따뜻하지, 바람은 살랑살랑 불지, 어디라도 가고 싶고,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썩이고 있어요. 뭐라도 할 수 있으니 오늘은 감자를 심어봅시다.



아, 먼저 사진을 찍읍시다. 아무것도 없는 지금 모습을 앞으로 종종 꺼내볼 테니까요. 무언가를 매일 보면 마치 뷰파인더를 눈앞에 대고 보는 듯 시야가 좁아집니다. 열매가 또 커졌네. 잎에 벌레가 생겼네. 눈앞의 현상은 가까이 보이고, 지난 과정은 새까맣게 잊어버릴 때쯤 사진을 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맨땅의 사진, 흙을 털어내지 못한 새싹의 사진을 보고 나면 매일 보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특히 일이 많아 피곤한 여름에는 생물이 채소 모양 사물처럼 느껴질 때가 더러 있어서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이야, 이게 이랬었지 신기해하는 새 마음이 되려고 합니다. 사진을 정방형으로 한 장, 세로로 길게 한 장, 클로즈업 한 장. 고요한 밭의 새 소리보다 카메라 소리가 유난스러워 민망하니 이쯤 합시다.

오늘 일의 순서를 생각합니다. 두둑을 만들고, 씨감자를 심는다. 오늘은 삽과 레이크(뭉친 흙을 부수고 땅을 고르게 만드는 농기구)만 있어도 되겠어요. 감자처럼 땅속에서 자라는 채소들엔 ‘두둑’이 필요합니다. 감자가 알알이 많이 들어차게 하려면 두둑이 ‘두둑’할수록 좋죠. 정작 감자는 심지 않았어도, 두둑만 만들고 나면 뿌듯해요. 보람찬 열기가 몸에 감돕니다. 물을 꼴깍 마시기 딱 좋은 타이밍이네요. 왠지 밀짚모자를 벗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도 쓰윽 닦아주고, 환하게 웃어줘야 할 것 같은데, 전 태생이 땀이 나질 않는 인간이라 닦을 땀이 없습니다.

감자는 곧 씨앗입니다. 씨감자가 따로 있지 않아요. 우리가 먹는 그 감자를 심으면 새끼 감자가 두둑을 가득 채울 만큼 뿅뿅 자라죠. 감자를 심을 때, 난제는 ‘위로 향해야 하나, 아래로 향해야 하나.’ 입니다. 싹이 조금 올라온 씨감자를 심어야 한다는 데엔 다들 동의하는 듯한데, 싹의 방향을 두고는 말이 많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누구는 싹이 위로 올라오게, 누구는 싹이 아래로 가게 심는데요. 위냐, 아래냐 두 쪽 다 저에겐 설득력이 있어서 매번 고민합니다. 처음 몇 해 동안엔 심는 감자 중 반은 위로, 반은 아래로 향하게 심었습니다. 중립을 지키고 싶었고, 두 쪽 결과 모두 알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농사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몇 번 실험한 걸로는 한쪽 편을 들 수 없겠더라고요. 해마다 날씨가 다르고, 흙의 상태가 달라졌을 거고, 어느 해 유독 가물어 벌레가 많았을 수도 있고요. 결국, 저는 끌리는 대로 심기로 했습니다. 친구와 약속 시간을 12시 정각으로 할까, 12시 30분으로 할까 망설여질 땐 12시 15분을 제안하는 게 속 편한 쪽인데요. 마찬가지입니다. 싹의 얼굴을 위로 올릴까, 아래로 넣을까 곤란하니 옆으로 보며 눕히는 게 저의 선택입니다. 사실 싹의 방향이야 어찌됐든, 다 잘 자라요. 그럼 됐죠.



감자는 춘분 전까지 심어주는 게 적당합니다. 그래야 여름 장마로 감자가 썩기 전에 수확할 수 있습니다. 채소를 심어야 할 때, 잡초를 뽑아줘야 할 때, 그리고 거두어야 할 때까지 농사에는 제철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때를 넘기면 그해 농사를 망치기도 하니, ‘에이, 하루쯤은’하고 무시할 게 못 되죠. 하지만 오늘이 26일이니 올해는 살짝 때를 넘겼네요.

“뭐든 다 제때를 아는 게 현명한 거야.” 버스 창밖으로 금색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 같다고 안부를 전했으니 노랗게 익은 벼 수확을 앞둔 때였을 거예요. “와, 신기해. 어떻게 식물들은 자기가 익어야 할 때, 꽃을 피워야 할 때를 다 알까?” 그랬더니, 전화기 너머 엄마는 “그게 현명한 거지, 멍청아. 뭐든 다 제때라는 게 있는 거야. 그걸 아는 게 현명한 거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얼른 더 나이 먹기 전에 시골에서 나오라고, 언제까지 농사짓는다고 쫄랑댈 거냐고 잔소리까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화를 끊고도 내내 맴돌았어요. 그 ‘제철’이라는 거요. 그렇담 나는 지금 뭐하기 딱 좋은 제철이려나 생각하다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집까지 걸어가는 논길에서도 그 생각만 나지 뭐예요. 뭐든 제때가 있다는데 왜 감이 안 올까… 그러다 문득, 서늘했습니다. 지금이 딱! 그만둬야 할 때인 건가? 나, 멍청하게 고집부리고 있는 건가? 움찔하며 걸음을 잠깐 멈췄던 것도 같아요. 직업이라기엔 변변한 수입이 없고 취미라기엔 즐거움보다 책임감이 더 묵직한 농사를 3년째 이어가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갑자기 막차를 놓친 기분이 덮치는 바람에 정말 서늘했어요.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지금이 바로 떠날 때인 거야 중얼거리며 마저 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수레를 끌고 밭으로 갔어요. 밤잠을 설쳤지만, 아무것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그만두기 좋은 때라는 확신은 미약했으나, 단호박을 따기 딱 좋은 때라는 확신은 확실했거든요. 단호박 제철이었어요. 그다음 주엔 보리를 심기 딱 좋은 때, 그다음 달엔 고구마를 말리기 딱 좋은 때, 그리고 다시 돌아온 봄엔 감자를 심기 딱 좋은 때라… 그만두는 건 미루다 보니 2020년이 도래했고, 2020년의 감자를 심고 있을 뿐. 모호한 저는 그대로인 와중에도 농사의 제철은 어김없이 찾아왔기에 못 이기는 척 따라다녔습니다. 제때를 딱 알아차리고, 제때를 넘기지 않는 것. 이게 곱씹을수록 인간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자 위로 흙을 덮으며 속으로 말합니다. 심은 자리를 꾹꾹 눌러주며 말하면 더 진심이 되어 버립니다. 무럭무럭 튼튼하게 자라주세요. 겉흙이 축축하다 싶을 만큼 물을 충분히 주고 나면, 오늘의 할 일은 끝입니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이 두둑을 적십니다. 두둑의 경사를 따라 떨어지는 물은 고랑을 따라 흐르다 한 곳에 고입니다. 물이 고이는 곳엔 잡초나 민들레 같은 것이 금세 자리를 잡습니다. 그 옆엔 다른 잡초 혹은 어쩌다 떨어진 깻잎이 자라기도 하고요. 아마 잡초와 감자, 이것저것이 뒤섞여 밭은 금방 꽉 채워질걸요. 때마다 할 일이 있고, 철마다 먹을 것이 있다는 건 종종 믿을 구석이 됩니다. 감자 심기를 끝내고 머릿속으론 벌써 감자를 수확해 쪄먹고 있어요. 김이 나는 감자를 방정맞게 호호 불며 먹을 생각에 허전한 기분은 없고 든든하기만 한데요. 언제까지 농사가 짓고 싶을까요. 올해는 그만둘 수 있을까요. 일단, 오늘 감자를 심긴 심었는데 말이죠.



*감자를 심을 때엔,

감자 심기에는 준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1) 싹이 난 씨감자를 준비합니다.

2) 뜨거운 물에 소독한 칼로 원눈(싹)과 복지점(싹 반대편에 있는 배꼽 닮은 것)을 이어 반 가릅니다.

3) 감자 단면에 유황가루 또는 재를 묻혀 그늘에 1~2일 건조합니다(재를 묻히면 자른 단면이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준비가 어렵다면, 크기가 작은 씨감자를 준비합시다. 자르지 않고 바로 심을 수 있습니다.

1) 레이크, 삽을 이용해 두둑(폭 60~70cm, 높이 30cm 이상)을 만듭니다.

2) 약 30cm 간격으로 검지가 들어갈 만큼 깊이의 구멍을 만듭니다.

3) 씨감자를 구멍에 넣고, 흙을 덮어줍니다.

4) 물을 줍니다. 끝

 

두둑을 만들 수 없다면, 크기가 넉넉한 화분 또는 포대에 감자를 심어볼까요. 폭과 깊이는 최소 30cm 이상. 공간이 넉넉할수록 감자는 크게, 많이 달립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