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이 허리께만큼 자랐을 때, 멀리서는 초록 커튼이 허공에 걸린 것처럼 보입니다. 완두콩은 열매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지주대에 단단하게 몸을 기대거나 덩굴끼리 뒤엉겨 자라는데요. 완두콩 여럿이 줄지어 서서 바짝 팔(덩굴손)을 낄수록 두 개의 줄기는 하나가 되고, 점점이 떨어져 있던 개별은 어느덧 빽빽한 면이 됩니다. 하얀 꽃이 듬성듬성 새겨진 커튼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살살 흔들립니다. 저는 그걸 가만히 봅니다. 그러면 덩굴손은 더 느리게 흔들리고요. 시선을 주고 귀를 기울이면 번갈아 내려앉는 햇빛이나 매미 우는 소리, 목덜미를 훑는 바람까지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감각됩니다. 온몸에 골고루 즐거움이 고이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맙니다. [완두콩 5kg 주문하고 싶습니다. 계좌번호와 가격 알려주세요.] 문자를 확인하면서 매미 우는 소리나 바람 같은 건 모두 작아지고요. [네, 발송하고 확인 문자 남기겠습니다!] 얼른 긍정의 확답을 보내고부터 저는 생각에 빠집니다. 완두콩이 1kg에 3,000원, 5kg면 15,000원이고, 택배비 3,000원을 빼면…. 한쪽 어깨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성큼성큼 완두콩 밭으로 향하면서도 돈, 돈 생각을 합니다. 가까이 갈수록 완두콩밭은 더 이상 초록 커튼이 아니라 오늘 택배 보낼 5kg로만 보여요.
완두콩 수확의 적기는 꼬투리를 만져보고 판단합니다. 꼬투리를 눌렀을 때, 속에 꽉 차오른 콩알이 느껴질 만큼 단단하거나 꼬투리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면 완두콩을 따기 좋은 때입니다. 완두콩 꼬투리는 잎, 줄기와 색이 똑같은데다 덩굴이 촘촘하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덩굴 아래서부터 위로, 앞과 뒤를 꼼꼼히 살펴 숨은 완두콩까지 발견합시다. 저는 덜 여물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괜히 꼬투리를 한 번 더 눌러보며 아직 멀었냐고 재촉하고 있어요. 덩굴 사이 거미줄은 끊어내고 덩굴을 옆으로 제치며, 오로지 앞으로 전진. 혐오하던 벌레가 손등에 떨어져도 개의치 않습니다. 완두콩 한 알 한 알이 이젠 돈으로 보이네요. 아, 이런 걸 두고 돈에 눈이 멀었다는 건가요?
언제부터 돈에 눈이 멀었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상당히 자주 이런 대화가 등장합니다.
“엄마, 나 천원만.”
“왜 자꾸 돈, 돈 하는데? 땅 파봐라. 돈이 나오나?”
정말로 그래요. 땅을 파도 돈은 나오지 않더라고요, 엄마.
이제 어떡하지.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귀농하고 한 해 아니, 두 계절이 지나자마자 알았죠, 어른 말씀 틀린 게 없었다는 걸. 3개월 동안 키웠더니 돌아온 양상추 값이 몇 만원 남짓인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우스 안에 빽빽이 심은 양상추를 다 팔고, 남은 잔고를 다 그러모아도 얼마 못 버티겠구나. 당장 다음 주 서울에서 만날 친구와의 약속, 새로 장만할 장화를 생각하니 쪼들려서 냉큼 알바천국 앱을 켰죠.
그 후 지금까지 제 하루 스케쥴은 이런 식이에요. 해가 뜨겁지 않은 이른 아침과 저녁에 밭일을 하고, 한낮엔 다른 곳으로 출근합니다. 한낮의 출근지는 이웃의 양파 밭, 떡 공장, 읍내 극장까지 필요와 시즌에 따라 매번 다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든 밭이 아닌 곳, 농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면 변함없이 맞닥뜨려야만 하는 것이 있었죠. 누군가의 수능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을 포장하고 있자니, 어린이 여러분들에게 화장실 위치를 안내하고 극장 구석에서 뽀로로를 보고 있자니 여지없이 묻게 되던데요. 내가 뭐하려고 귀농했더라?
희망 직업(농부)과 생업이 불일치했던 지난한 시간은 고스란히 통장에 기록됐습니다. ㅍㅁ떡공장 50,000원, 김ㅇㅇ완두콩값 15,000원, 양파수확일당 60,000원…. 출처도 제각각인 옹졸한 액수가 통장에 드나드는 것을 헤아리면서 절실히 느끼는 건,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은 아니라는 겁니다. 분명 같은 크기에 같은 색으로 인쇄된 숫자일 텐데 어떤 돈은 따로 밑줄이라도 그은 것처럼 눈에 더 잘 들어오는 것만 봐도 그렇죠.
김ㅇㅇ완두콩값 15,000원
1년 동안 간간이 수확물을 팔아 벌어들이는 돈은 사용 가치보다 의미가 더 크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념품에 가깝습니다.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죠. 생활에 시달리는 사이 잠깐 잊었던 나의 본거지가 농사, 밭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로서 그 돈의 쓰임은 충분합니다. 인출한 돈은 지갑이 아니라 빳빳한 돈 봉투에 넣어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돈은 쓰지 말자 약속합니다.
그런데 왜 꼭 그런 약속은 얼마 안 가 깨질까요. 닥쳐오는 겨울을 나려면 연탄 사야지, 늦지 않게 밭 임대료도 내야지. 이게 어떤 돈인 줄 알아? 아냐고?!! 다그쳐도 제 손은 이미 봉투에서 돈을 꺼내 세고 있는 걸요. ‘네가 건네준 1달러도 그저 돈이 돼버리는 게 너무 싫어.’ 가수 김사월의 노래 <세상에게> 중 이 대목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완두콩이 돈으로 보이는 게 싫은데. 정말 이렇게까지 돈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죠. 어떤 돈은 그냥 돈이 아니라는 걸 사월 언니가 알아주다니. 엉엉
농사를 짓다보면 속세와 돈에 집착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도시에서보다 나날이 돈에 연연합니다. 두문불출하는 농사 고수가 되기는커녕, 돈이 되는 알바라면 호미를 놓고 달려갔으니 농사보다 돈에 더 통달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돈에 초연해지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구체적으로 욕망하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대충 이런 것들을 바랍니다. 고마운 마음 또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려 할 때에 호의가 통장 잔고에 가로 막히지 않기를.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다는 말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가 그것도 다 돈이 있어야 한다는 한숨으로 맺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어쩌면 먼 훗날에는 땅을 파보니 돈이 좀 됩디다, 껄껄. 엄마 눈 앞에 돈을 흔들어 보일 수 있기를.
초연해지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구체적으로 욕망이라도 해보죠. 혹시 아나요.
*완두콩 기르기
이른 봄, 아무것도 심기지 않은 땅에 가장 먼저 감자를 심는데요. 그때, 완두콩도 뿌립니다.
1) 편평한 이랑에 한 뼘 반 간격마다 손가락 한 마디를 푹 찔러 넣어 구멍을 냅니다.
2)구멍에 콩 세 알씩 떨어트리고 흙으로 살짝 덮은 뒤, 흠뻑 물을 주면 끝. 진 땅, 메마른 땅 가리지 않고 잘 자랍니다.
3) 완두콩 키우기의 핵심은 완두콩 줄기가 지주를 잘 타고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완두콩 덩굴 곳곳에 바람과 해가 잘 드나들어 고르게 꼬투리가 달리고,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죠. 완두콩 줄기 곁에(혹은 이랑 군데군데) 지주를 박고, 완두콩이 두 뼘 길이만큼 자랐을 때부터 자라는 속도에 맞춰 지주 사이에 줄을 대주어야 합니다. 덩굴손이 줄이나 지주를 단단히 감는지 확인까지 해주면 더 좋겠죠.
도통 뭔말인지 모르겠다면, 농사 문의를 해주세요.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