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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용할 양식 Oct 31. 2020

5. 방금 확신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중

영화 <리틀포레스트>가 개봉했을 때,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영화를 보니 네 생각이 났어, 잘 살고 있니 난데없는 안부 연락부터 시골에 사는 사람으로서 영화를 어떻게 봤냐 소감을 묻는 연락까지 질문은 달랐지만 제 감상의 첫 마디는 늘 같았습니다.

“시골길에서 그렇게 자전거를 탔다간 엉덩이가 부서질걸.”

그러니 혹여나 귀농해서 자전거를 타더라도 길이 비포장이라면 돌아가라 으름장을 놓았죠.

 저는 극장에서 봤습니다. 고즈넉한 툇마루, 소담한 한 끼, 생생한 계절감이 스크린에 가득 등장하는 모습을 넋 놓고 즐겼어요.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고 가을 논 사이 한 가운데로 달려 나옵니다. 점차 클로즈업. 그가 탄 자전거와 시골길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오는 그때, 저는 그만 다른 생각으로 확 미끄러지고 맙니다. 시골길에서 저렇게 온화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요?

시골의 비포장길을 얄팍한 자전거로 달리다보면, 길의 요철감은 고스란히 관절에 진동을 울립니다. 덜커덩, 바퀴가 거칠게 굴러 떨어질 때마다 아아, 내 허리! 허리 수술 3,000만원! 심장이 함께 덜커덩합니다. 허리만이라도 보호해야한다 필사적일수록 엉덩이는 바짝 긴장하고, 안장 위에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상태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어느새 인상은 험악해지기 마련이었단 말이죠. 영화 속 주인공은 가장 가깝다(하지만 적어도 1시간은 걸린다)는 슈퍼나 논에 오갈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데요. 장면마다 저는 오로지 그 길이 비포장인지 눈을 크게 뜨고 살폈습니다. 촬영 당시 배우의 엉덩이가 곤혹을 치르진 않았을지 추궁하느라 번번이 흐름을 놓쳤지 뭐예요. 


이후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 끼어드는 감상은 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저 집과 땅을 물려받았을까. 그렇다면 쫓겨날 일은 없겠군. 그래도 자기 고향인데 먹을 것, 일자리 구하는 덴 수월하겠지. 쓰고 보니 참으로 볼썽사나운 꼬인 마음인데요. 그땐 그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타샤튜더>, 예능 프로 <삼시세끼>처럼 시골 풍경의 아름다움이 부각되는 볼거리가 쏟아졌지만, 무얼 보고 들어도 저는 냉소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타샤튜더가 정원을 가꾸는 데 든 씨앗 값은 얼마일꼬(부럽다). 삼시세끼를 챙겨먹기만 하는 시골 생활, 팔자 좋구먼(부럽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저를 두고 리틀 포레스트의 삶이구나 부러워했지만,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도 리틀 포레스트의 삶을, 삼시세끼의 삶을 부러워했습니다(그땐 그랬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부럽고 심술이 납니다).

어째서 야채를 담을 곳이 소박한 소쿠리가 아니라 핫핑크 대야뿐인가. 왜 나의 주방엔 빛 잘 드는 창문이 없는가. 시골이라는 배경을 제외하면 주인공과 제 생활 사이 어느 하나 공통하는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저의 이야기라고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여름이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 때문입니다. 긴 장마로 다 익기도 전에 썩어가는 토마토를 보며 고민하는 그에게 이웃은 하우스(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비닐 온실)를 싸게 빌리라 조언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야 혼잣말로 대답하죠.

“하우스를 짓게 되면 코모리에 정착하게 될까. 그게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아 계속 미루고 있는 거다.”

듣자마자 저는 그의 시선과 고민 위에 제 목소리를 단번에 포갤 수 있었습니다.



‘내일 종일 흐린 가운데, 연이은 장마가 금주 내내 이어지겠습니다.…’

이런, 또 비군요. 선풍기 바람이 달라붙는 습기를 흐트러트리면 금세 선선해지는 8월의 끝인데도 장마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올해는 유독 비오는 날이 길었습니다. 장마를 기다렸던 저로서도 당황스러울 만큼 최장기간 장마였다죠. 먹구름과 비바람이 계속되는 탓에 여름다움을 누리지 못한 채 여름을 끝낸 것이 억울하기까지 한데, 아마 밭의 작물들에게도 곤혹스러웠을 테지요. 비가 그친 뒤에 밭에 가면 시달린 기색이 역력합니다. 줄기에 달려 있어야 할 토마토는 전부 땅에 떨어져 있고, 노랗게 갈변한 줄기는 힘없이 축 처져 있습니다. 장마가 계속되거나 습도가 과하면 토마토는 쉽게 줄기가 썩고 열매가 무릅니다. 노지(지붕으로 가리지 않은 밭이나 화단)에서 완숙 토마토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은 건, 한국에서 장마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에요. 역시 하우스가 있어야 하는 건가.

하우스가 없는 덕에 날씨 핑계를 대며 게으르게 되는 것이 저의 낙이지만, 가끔은 저도 하우스를 지어볼까 골몰합니다. 하우스가 있다면 장마에도 토마토와 허브는 무사할 테고, 날씨가 궂을 때도 모종(옮겨심기 위해 가꾸는 어린 식물)을 잘 키울 수 있을 텐데. 없어서 아쉬운 점을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우스를 짓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제 호감 문제 때문은 아닙니다. 하우스를 확 지어버리자든가 내 땅을 사보자든가 본격적으로 덤빌라치면, 늘 이런 질문이 튀어 오르는 겁니다. 

이대로 여기에 머물러도 괜찮겠어? 


농사는 머무름을 전제합니다. 적어도 씨를 뿌려 기르고 거두기까지 내가 정한 이곳에 정착하겠다, 아무 때나 부재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필수적이고요. 한번 뿌리를 내린 이상, 위치 조정은 어렵죠. 그래서 저 역시 오늘도 미루고 있습니다. 하우스를 짓고 땅까지 사버리면 더는 빼도 박도 못할까봐서요. 하다못해 반려목, 다년생 식물을 심는 일처럼 더 오랜 확신을 요구하는 일도 저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이대로 정착해도 좋은 걸까 계속 미적거리는 태도로 빌린 땅에서 한해살이 농부로 살 뿐. 첫해는 해봐야 감이 오겠지, 한 해만 보고 판단하기엔 이르지 라며 몇 해를 넘겼지만 그래, 바로 여기다. 방금 확신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갔다,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은 없더군요. 제 확신의 수위는 턱없이 낮아서 돌아오는 답 없이 질문만 허공에 울립니다.

아주심기. 온실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제대로 심는 일을 아주심기 또는 정식이라고 말합니다. 모처럼 정식으로 준비해서 정식하지 않아도 토마토는 뻔뻔하리만치 어디에서나 아주심기를 잘하는 야채입니다. 곁순(원줄기에서 돋아난 순)을 잘라 흙에 꽂아주기만 해도 며칠 뒤면 금세 뿌리가 나고 원래 제자리였던 양 자라는데요. 여름 내내 빛과 열기를 몽땅 누리며 잘도 익어가는 토마토를 보고 있으면 애초에 제자리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싶어요. 알고 보면 제자리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서 마련되는 걸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땅의 호흡을 알아가고, 땅은 사람의 발걸음에 맞추어 달라집니다. 반려 동물과 사람이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과 같죠. 땅과 사람이 서로에게 서투르지 않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쌓이는 동안  제자리가 마련되는 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아마 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요. 


*토마토 순지르기에 대해

토마토 곁순을 잘라주는 것을 ‘순지르기’라 부릅니다. 열매와 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생장에 불필요한 곁순은 잘라주는 것이 좋습니다. 토마토가 두 뼘 정도 자랐을 때부터 줄기 사이에 곁순이 자랍니다. 곁순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에는 원줄기를 양 팔이라 생각하고 겨드랑이에 솟아난 작은 순을 찾는다 생각하면 조금 더 수월합니다. 가위를 이용하든 손으로 툭 분질러주든 최대한 바짝 붙어 잘라줘야 합니다. 맑은 날 혹은 한낮에 순지르기해야 잘라낸 부위가 물러지거나 병해가 생기는 일을 피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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