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용할 양식 Oct 11. 2020

2. 그런데, 장마는 언제 시작되지요

상상해보세요. 느닷없이 이런 문자가 도착하는 겁니다. ‘오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일 못하니 출근하지 마시오. -사장-’ 이게 웬일이지 얼떨떨하다가 이게 웬 떡이냐 짜릿하지 않을까요. 저에게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돌연 휴무 소식이 도착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하죠.

‘아싸, 비온다.’

투둑, 툭툭, 쏴아- 빗소리에 귀가 먼저 뜨이는 아침입니다. 농부에게 상사가 있다면, 그건 날씨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날씨는 농부의 하루를, 할 일을 좌지우지 결정합니다. 오늘은 -밭 임시 휴무- 메시지가 하늘에서 떨어지네요. 저는 이불 속에서 벌써 웃고 있습니다. 서둘러 밭에 갈 필요 없다는 걸 귀가 알아챈 순간부터 제 몸은 말랑해졌어요. 몸을 한껏 펼쳤다가 도로 웅크려본다든가 발가락으로 파도타기해본다든가 이렇게 <축 휴일> 세레모니를 마치고 알람을 모조리 끕니다. 비오는 오늘은 조금 더 자도 되는 날이에요.



빗소리가 여전히 창문을 세게 두들깁니다. 빗방울이 연이어 부딪히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다보면, 저는 하우스가 생각납니다.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비닐 온실을 보통 ‘하우스’라 부르는데요. 그 하우스 안에서 듣던 빗소리가 매번 떠올라요. 빗방울이 하우스 비닐을 마구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굉장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엔 빗소리가 이렇게 요란스러울 수 있다니 놀랐어요. 어릴 때 미술 시간에 악기를 만들어보자 하면, 쌀이나 콩을 페트병에 넣고 마구 흔들어대잖아요. 그 페트병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밖에선 별스럽지 않던 빗소리가 하우스에 들어서면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요란합니다.

장마철 하우스의 빗소리는 폭포 아래 서있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바로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아서 ‘비가 많이 오네!’ 소리 질러야만 들릴 정도였어요. ‘그래, 알겠어!’ 엉뚱한 대답이 돌아올 땐 결국 대화는 포기하고 각자 다른 생각, 다른 일을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잠깐 할 일을 내려놓고 빗소리에 심취했습니다. 그러면 ‘시원~허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죠. 골 때리는 잡념이나 개운치 않은 감정 따위 고랑을 따라 씻겨 내려갑니다. 비가 오는 날, 떠오르는 하우스의 낭만은 저에겐 이정도인데요.

사실 저는 하우스 농사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우스가 싫었던 건 아니에요. 들이쉬는 숨이 후덥지근한 딱 이맘때 하우스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골에선 여름이 가까워 올수록 뿌려야할 것도, 거두어야할 것도 많아 해가 떠있는 내내 일할 만큼 바쁜데요. 곤란한 점은 내가 바쁠 때와 남들이 바쁠 때가 같다는 점입니다. 내가 모내기를 해야 할 땐 이웃 할아버지도 모내기를 해야 하죠. 때는 놓치지 말아야겠는데, 일손은 부족하니 여기저기서 도와달라, 알바가 필요하다 요청이 쇄도합니다. 그래서 한창 농사철인 여름부터 가을까지 쉬는 일이 요원합니다.

귀농하고 처음 맞이한 초여름부터 저는 비가 내리길 바라곤 했습니다. 제발 내일 하루만 쉬고 싶다 생각했죠. 그러다 감자 수확 일손을 거들기로 한 날, 마침 아침부터 비가 왔습니다. ‘어쩌면 일이 취소될지도 몰라. 그럼 집 가는 길에 구구콘 사가야지.’ 내심 기대했습니다만, 웬걸 하우스가 있으니 괜찮다는 거예요. 

“하우스에 들어가서 하면 되잖아.” 

지독한 인간들.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맥이 빠진 저는 기계에서 데굴데굴 떨어지는 감자를 상, 중, 하 크기별로 상자에 담았어요. 어째서 하우스 같은 걸 지은 거냐 속으로 울부짖다 감자 한 알 한 알에 약속했습니다. 하우스 농사는 짓지 않을 거라고 말이에요. 이후에도 그런 일은 반복됐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니 하우스나 손볼까.” “겨울엔 하우스에서 농사지어야지. 왜 쉬어.” 아니 왜, 비가 오는데 쉬지 않습니까. 한겨울 추울 땐 사람도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여야 한다고요. 다들 왜 그러세요. 속으로만 말했습니다. “암요, 당연하죠.”,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적당한 대답을 끼워 맞추곤, 슬금 뒤로 물러났어요.



하우스는 날씨와 계절의 변덕이 통하지 않는 공간입니다. 덕분에 1년 내내 농사지을 수 있고, 한겨울에 수박을 먹을 수 있기도 합니다. 농사에선 제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했지만, 하우스라는 인공의 공간에서 제철이란 말은 무력해집니다. 우리는 언제나 일할 수 있고, 언제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가능합니다!’를 만나면 전 슬금 물러서게 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가능한 편리 탓에 핑계거리를 하나둘 잃어버린 저는 조금 괴롭기도 하거든요.

와이파이는 어디서나 빵빵 터지고, 누구나 쉽게 완성한다는 취미 클래스가 늘어날수록 ‘이렇게 쉬어도 되나’ 어쩐지 게으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되려 시달립니다. 밤에도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는 방에 있는 기분이에요. 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불빛이 환해서 적당한 핑계를 대려 해도 누군가는 뻔히 알 것 같은 방입니다. 가끔은 모르기도 하고, 변명도 할 수 있는 곳에 숨고 싶습니다. 몰라도 되는 곳에서 비로소 편안할 때도 있는 거겠지 하며 제게 핑계 몇 가지는 남겨두었습니다. 이곳은 와이파이가 가끔 잘 안 터져서 카톡을 못 읽었다고도 해보고요. 하우스가 없다는 핑계로 긴 겨울 여행을 가져보기도 하고요.

인간과 땅 어느 쪽도 쉬지 못하는 공간이란 걸 볼 때, ‘하우스’라는 이름은 기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곳은 누구에게 집이 되는 걸까 물으며 저는 지금 집에 있습니다. 비가 그치기 전에 일어나야겠어요. 언제나 가능한 게 많은 요즘이라도 비는 언제나 내려주질 않으니 빗물을 받아두려고 합니다. 입구가 넓은 그릇이나 양동이는 모두 밖으로 꺼냅니다. 빗물에는 식물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으니 빗물을 받아두었다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에 틈틈이 주면 도움이 됩니다. 어느새 양동이에 빗물이 참방참방 차오르는 걸 보며,비가 와서 오늘은 밭일하기 글렀구나 날씨 탓을 해봅니다. 그리고 저는 기다려요.

올해 장마는 언제 시작되지요? 



*빗물엔 식물 성장에 꼭 필요한 ‘질소’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비가 내릴 때, 우리가 숨 쉬는 공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질소가 비에 녹습니다.

식물은 빗물을 통해 수분 흡수 뿐 아니라 양분 흡수까지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이전 01화 1. 언제까지 농사가 짓고 싶을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