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자식은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닥까지 나를 끌어내리기도 하고, 저 높은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대게 하기도 한다. 부끄럽게도 결혼 전에는 복잡한 버스 안에서 아이를 업고 손에 잡아 끌고 위태롭게 서 있는 아이엄마를 볼 때면 저렇게 힘들게 살 바에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항상 애처로워 보였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자라왔기 때문일까. 그런데 불과 자가용이 생기기 몇 년전까지도 나는 딸 아이를 데리고 발달 센터를 전전하며 버스, 지하철을 타고 30분에서 1시간 거리를 왔다갔다 했다. 가끔 버스안에서 아이가 잠들기라도 하면 업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를 겹겹이 입어 얼마나 힘들던지 한여름처럼 땀을 흘리며 돌아와서는 또 아이와 남편의 저녁상을 차렸다.
친정 엄마가 가끔 잠언 말씀 17장 6절을 말씀하시면서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는데, 자식이 부모의 면류관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었다. 내 자식이 가시 면류관일 때도 있고, 황금 면류관일 때도 있다고. 나도 조금 느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뼈에 새겨지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잠언이구나.
딸 아이가 유치원 다닐 즈음, 다른 엄마로부터 우리 딸의 엄마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도 들었었는데, 요즘도 다른 엄마들은 나를 칼자국 난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설마 우리 딸 아이가 너무 똑똑해보여서 궁금해 하진 않았을 테고, 아이가 발달이 느리고 눈치도 없고, 반 친구들과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며 우스꽝스럽게 행동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엄마들 귀에 들어가서 ‘대체 그 아이 엄마 누군가’ 했을 테지. 우리 아이가 느리다고 동네방네 “네, 경계성 지능입니다. ADHD입니다. 약은 먹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도 했고, 의사의 진단도 받았으니 괜찮습니다. 걱정마세요. 오지랖은 그만해주세요.” 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요즘 지적장애 등급을 받으려고 알아보고는 있다. 차라리 “장애인입니다”라고 말하면 동네방네 엄마들의 궁금증이 덜할까?
시댁에서도 아이가 말이 느려서 언어치료를 받을 때만 해도 “엄마가 하도 집에서 싸고 돌아서 말이 느린거다. 어린이집을 보내면 금방 말이 늘거다.” 라고 하셨었다. 유치원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센터 치료를 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지능이 좀 낮거나 ADHD 아이들은 불안감이 높다. 계단이 많거나 좁은 하천의 돌 계단도 지레 무섭다고 생각하고 잘 도전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딸도 시아버지와 조카들끼리 산책을 나갔다가 하천의 돌 계단을 못 건너겠다고 난리를 쳐서 시아버지가 꽤 당황하셨나보다. 나보고 밖에 잘 안 나가는 게 아니냐고 하시며 딸 아이를 있는 그대로를 보려 하지 않으셨다. 아이의 모든 잘못?은 내 탓이었다. 물론 아이의 진단결과에 대해 이미 말씀을 드린 후였는데도 계속해도 그런 반응이라 이제는 더 얘기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낀다.
남편은 시댁에서 이런 반응이 올 때마다 핸드폰 게임에 몰두하고 있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올 때 이러이러한 상황이 있었고 시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면 “그랬어? 난 몰랐는데” 하고 끝이다. 내 자식이 주는 고통스런 가시 면류관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된다. 그저 남편은 시청자 모드이다. 내 자식이 잘하고 이쁘면 남편이나 시댁에서는 황금 면류관을 앞다투어 나눠 가지려 한다. 그 영광을 엄마도 누리겠지만 그게 엄마의 진짜 모습은 아닐거다. 백조가 물 밖에서는 우아하게 보일지라도 물 속에서는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엄마들은 그저 자식들의 발이 될 뿐이다. 하지만 자녀가 장애인이라면 그 발은 엄마를 더 깊은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엄마는 숨이 차도록 발버둥을 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