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넓얕
어린 시절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에 재주가 많은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배우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남들보다 빠른 습득력을 보이다가 이내 관심이 식어서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또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때문에 여러 분야를 알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기능은 많지만 기능별로는 성능이 떨어져서 쓸 곳이 없는 전자제품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 교교 시절 학벌이 없으면 이도 저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최대한 집중하여 공부를 해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 좋게 취직을 하게 됨으로써 평타는 치는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있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욕구는 일단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눌려진 채로 일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들어와서 초반에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슬슬 적응을 하게 되면서 좀 무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게 되는데, 심심하던 어느 날 문득 예전에 들었던 나꼼수가 생각나서 팟캐스트라는 플랫폼이 성장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팟캐스트를 켜보니 지대넓얕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방송이 1위를 하고 있었는데,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말이 끌려서 1화를 들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 사후세계를 다루어서 흥미롭게 들어보았는데, 사실 생각보다는 좀 실망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름 방송이 괜찮았고 계속 심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2화, 3화를 듣다 보니 제 취향에 딱 맞는 방송이었고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지대넓얕은 아마 나꼼수 이후 가장 성공한 팟캐스트일 것입니다. 시류를 타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인지 종영된 지 한참 지난 방송임에도 아직 팟캐스트 상위권에 랭크가 되어 있습니다. 나꼼수 이후 팟캐스트에는 정치 관련 콘텐츠가 많았었는데, 정치색 없이 순수하게 지식을 다루는 방송이었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저에게는 나꼼수보다 훨씬 맞는 방송이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그 관심만큼 좋은 자료를 구할 수 없어서 정지해있던 제 지식의 폭을 다시 넓혀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제가 한 번씩 관심을 가졌었지만 자료의 부족과 그에 따른 관심 저하로 어설프게 알았던 내용이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지식이 정리가 되었고, 다시금 지식에 대해 탐구하고픈 욕구가 폭발하게 되었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시대는 저의 탐구욕에 동력이 되어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얕은 지식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상당한 양의 자료 조사를 하고 콘텐츠를 진행하는데 서로 자유롭게 딴지를 거는 것이 이 방송의 묘미입니다. 이전까지의 대부분의 콘텐츠는 많은 자료를 기반으로 한 사람이 발표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잠시 가지는 정도의 일방적인 강연 형태가 많았는데, 지대넓얕은 잘 몰라도 막 지르고 묻는 패널들의 태도가 저의 의문의 많은 부분을 풀어주었고, 저만의 또 다른 생각을 구축하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과의 끝에 있는 이독실 님의 상상 못 할 질문에 당황해하는 문과 패널들의 황당해하는 반응과, 그럼에도 끝까지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모습에서 많이 재미있었고, 느끼는 점도 많았습니다.
이독실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네 명의 패널 중 유일한 이과 영재 출신인 이독실 님은 자칫 평범한 방송으로 갈 수 있는 내용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세 명의 문과 패널들은 나름 의견의 대립각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학 등을 공부해 왔기 때문에 일반인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틀 안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치 기계 같은 논리로 날카로운, 때로는 엉뚱한 질문을 하는 이독실 님은 이 방송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요즘 채사장 유니버스 등의 유튜브 방송에 나오는 이독실 님을 보면 너무 인문학적 지식이 쌓이다 보니 유해져서 조금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 아쉽긴 합니다. 과거 같은 똘끼로 인문학의 비논리적인 부분을 공격하던 패기가 조금 그립기도 합니다. 또한 과학 콘텐츠를 래퍼처럼 쏟아내는 이독실 님의 모습 또한 이 방송의 백미입니다. 항상 시간이 모자라서 스튜디오에서 쫓겨나면서 여운을 남기며 어떤 교훈적인 결론을 내지 않기 때문에 항상 계속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모습 역시 의도한 바는 아닌 것 같지만 방송의 질을 더 높였다고 생각합니다.
콘텐츠가 제 취향에 맞았고 재미있었지만 이렇게나 크게 히트를 친 것은 조금 의아했습니다. 중간중간 위트 있는 개그가 있지만 코미디처럼 빵빵 터지는 방송도 아니고, 더 심도 깊은 책이나 방송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콘텐츠를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와 같은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글을 써보자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지대넓얕의 청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