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학창 시절 보통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면 이상한 부심 같은 것이 생깁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중고등학교 시절 주위에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매니악한 취향이었습니다. 특히 락 부심과 고음 부심은 참을 수 없었는데, 저는 매니악한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편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듣는 곡들을 뺏어 들어보면 제 귀에는 대부분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어쨌든 음악을 좋아하는 묘한 부심이 있는 친구들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가수들을 가차 없이 까기 일쑤였습니다. 넥스트는 그 까임에 단골 고객이었습니다.
본인은 아이돌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명색이 락밴드임에도 가창력이 많이 딸린다는 말이 가장 많았고, 너무 말랑말랑한 대중적인 노래를 많이 불렀기에 마니아들의 까다로운 기준에는 영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창 누구라도 깔 거 같은 질풍노도의 중학 시절이었던걸 감안하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Painkiller 같은 날카로운 고음 곡이나, 딥 퍼플, 블랙 사바스 같은 헤비메탈을 듣던 그들에게 신해철은 좀 실력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김세황의 연주 실력만은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대중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강력한 팬이었기에 무언가 좀 라이벌 같은 넥스트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국카스텐의 하현우가 엄청난 가창력으로 복면가왕에서 연승을 달리고, 이로 인해 유명세가 올라갔습니다. 저와 동갑인 그는 역시나 신해철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는지, 경연 동안 신해철의 곡을 무려 3곡이나 불렀습니다. 그의 가창력은 신해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 마치 신해철의 노래를 다시 부활시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보컬을 지닌 국카스텐의 노래 중에 제가 아는 노래가 한 곡도 없었습니다. 곡을 들어보아도 이미 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마음에 딱 들어오는 곡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다지 관심 없다고 생각했던 신해철의 3곡은 모두 제가 잘 알고 있고 좋아했던 곡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생각보다 많은 곡을 알고 있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의 곡이 모두 좋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세계적으로도 락음악이 차트 상위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신해철의 히트곡은 물론 비교적 말랑말랑한 곡이 많긴 하지만, 락을 베이스에 두는 밴드가 저렇게 많은 곡을 히트시켰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극한의 가창력을 지닌 하현우가 그들 밴드의 곡보다 신해철의 곡으로 더 유명하고 많은 감동을 준 것을 보면 신해철의 곡 쓰는 능력이 경이롭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해철이 음악만 잘했다면 제 인생 콘텐츠에 들 정도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태지 파였던 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의 삶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마왕이라 불리며 카리스마를 구축한 그지만, 그의 삶은 보면 정말 인간적인 매력으로 넘쳐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을 알고, 질 것임을 알더라도 논쟁에서 도망가지 않는 그의 신념에서 대단함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마치 동네 바보 형 같은 허당스러운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곡이 히트를 친 메이저 음악가임에도 항상 인디밴드를 지원하며, 제도권 음악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합니다. 그렇지만 또 걸그룹은 너무 좋아합니다.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복잡한 그의 성격은 상당한 매력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적절한 가사가 민물 장어의 꿈에 나타납니다.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그는 항상 자신감 있고 카리스마 있게 말하지만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실수를 많이 하기도 하죠. 계속해서 멈추어 있지 않고 자신을 깎고 자르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마왕이라는 독재자 같은 이미지답지 않게 말하는 사람의 위치나 진영과 상관없이 받아들일 만한 논리와 의견이 있으면 귀담아듣고 받아들이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각을 물론 싫어하고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주장의 맞고 틀림은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의 이런 열린 태도에 많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몰래카메라에서 그는 자신을 떠나겠다는 후배에게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되 인간적인 예의는 지켰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킵니다. "네가 나를 배신했다고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다른 회사에서 만약에라도 잘 안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까 봐 화가 나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의 인생을 본다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허세도..?) 유명한 철학자 중에는 그의 사상과 삶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신해철은 철학적인 가사와 좋은 노래를 만들었고, 그에 맞는 삶을 산 멋진 사람입니다.
"야, 돈 걱정은 너네가 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해!"
전람회 앨범을 프로듀싱한 신해철은, 전람회 1집 앨범 "여행"이란 곡에서 김동률과 서동욱이 브라스를 쓰면 돈이 많이 들 것을 걱정하자 츤데래처럼 던진 대사입니다. 좀 허세에 가득 찬 형 같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실력 있는 후배들을 지원하려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허세스럽지만 언제나 진심과 함께 있었던 그를 추모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상에 내 친구로 태어난다면 정말 즐거울 것 같습니다.
그는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을 아직도 믿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