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중고등학교 시절 좀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이런저런 입문서를 보다 보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유명한 철학자의 저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말입니다. 무슨 그렇게 어려운 말이 많은지 도무지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읽었던 책이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 같은 책이었는데, 명색이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소설이 이 정도인데 칸트의 비판 시리즈 같은 것은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후 현학적인 글을 극혐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어리고 지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쓸데없이 한자가 적혀있고 어렵게 설명한 성문 영어, 핵심이 뭔지 모르게 어렵게 설명이 적힌 하이탑 과학 같은 참고서를 보며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저로서는 이런 류의 책이 더욱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만약 사르트르의 책이 논문이었다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용어를 써도 논리와 증명만 되면 괜찮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대중에게 읽히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소설마저 이런 식인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는 철학자들에게 실망을 할 무렵, 우연히 철학서 같지 않은 제목을 가진 소피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딱 제가 원하는 수준의 깊이로 철학사를 다루고 있었고, 마지막 반전 역시 신선했습니다. 같은 지식을 형식과 문체를 바꿈으로써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철학을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또 시대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세대도 책이라면 질색하는 사람들이 많고, 만화책조차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느 정도는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유식해 보이고 일종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았었습니다. 요새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이상 어려운 내용은 읽지 않으려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내용을 최대한 쉽게 만들어 떠먹여주는 영상까지 무료로 제작하여 제발 보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멀리하는 세상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초등학생들 중에는 시곗바늘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디지털시계에 익숙하기 때문에 굳이 시곗바늘을 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요즘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없습니다. 시계를 읽지 못하고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것이 과거에는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자연스럽습니다. 시계나 전화가 없던 시대에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지식을 단지 필요에 따라 읽고 외웠을 뿐입니다. 요즘 세대들이 못한다고 퇴화한 것이 아니고 단지 변화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처럼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멀리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진보나 퇴보라는 기준으로 싸잡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제 성격은 변화에 호의적입니다.
소피의 세계 결말 부분은 예전에는 단순히 충격의 결말 정도로 생각했는데, 요즘엔 오히려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천한 지식이지만 과학 분야를 알아갈수록 나라는 존재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세상은 아주 고해상도의 게임 속 그래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자 역학을 알아보다 보면 이 세상은 최소 픽셀의 크기가 존재하고, 고온과 저온의 한계가 정해져 있으며, 필요한 부분만을 계산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2진법을 사용하여 모든 정보가 구성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4개의 코드로 정보가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몸은 4진법으로 이루어진 코드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가 보는 육체는 마치 코드를 모니터 화면에 구현한 그래픽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트루먼쇼, 매트릭스, 소피의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은 가상의 세계를 탈출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마찬가지라면 우리는 탈출할 수 있을까요? 탈출한 그 세계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요?
어린 시절 문득 든 나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생각은 여러 컨텐츠를 거치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었고, 생각보다 많은 컨텐츠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저의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책을 기피하면서 생각의 고리가 끊어질 뻔했던 시절, 소피의 세계는 나를 잡아주었고, 그덕에 아직도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쉽게 쓴 글이 진정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기부터 해서 무언가 쓰는 것을 싫어하던 제가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하고 브런치에 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도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