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만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기생수

by 평범한 직장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책에 한창 빠져있던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매일 대여점에 가서 3~4권의 만화책을 빌려 봤던 것 같습니다. 인기가 많고 재미있어 보이는 작품들을 보다 보니 어느새 볼 작품들이 없어져서 점점 재미가 없어 보이는 작품에까지 손이 가게 되었습니다. 기생수라는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제목에 마음에 안 드는 그림체가 특징인 작품이 보였고, 그날 유독 빌릴 만화책을 고르지 못해서 1권을 우연히 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몰입해서 본 후 2권을 빌릴 수 있는 다음날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우주에서 온 특이한 생명체, 물론 지구인의 입장에서, 기생수가 지구에 정착하는 과정이 그려진 기생수는 너무 참신한 설정에 놀랐고, 저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나무 위키에는 간략히 줄거리가 적혀 있습니다.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기생 생물들. 이 생물은 인간의 뇌에 침입해 머리에 기생하고 육체를 차지, 다른 인간을 포식하는 생태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뛰어난 의태 능력과 학습 능력으로 점차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데,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인 이즈미 신이치도 한 기생 생물에게 습격당하게 된다.


하지만 신이치의 필사의 발악이 통해 기생 생물은 신이치의 뇌를 차지하지 못하고 오른팔에 불완전하게 기생, 동화되어버린다. 그렇게 신이치는 자칭 "미기(ミギー, 오른쪽이)"와의 기묘한 공생을 시작하게 된다.




기생생물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여 살아갑니다. 인간의 뇌를 차지한 기생수는 압도적으로 인간보다 강하며,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하지만 기생생물이 반드시 인간을 잡아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인간이 먹는 음식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지만, 그들이 태어날 때 머리에 심어진 강한 명령이 있습니다. "인간을 죽여라" 기생생물은 인간을 숙주로 삼기 때문에 인간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인간을 먹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쩌면 요즘 난리인 코로나와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014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도입 부분에 마치 코로나를 연상시키는 바이러스가 그려집니다.

바이러스.jpg


뇌에 침입하는 것에 실패한 신이치의 오른손이는 초반에 상당히 징그럽고 잔인하게 그려집니다. 인간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이코 패스라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비이성적이게 흥분하는 신이치를 진정시키고 보호하는 것은 순수하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며, 신이치를 죽이고 다른 숙주에게 가지 않는 이유도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서입니다. 신이치의 주변인들이 동족에게 당하는 것을 막는 이유도 막아서 신이치를 진정시키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며, 본인의 생존에 유리하다면 동족을 죽이는 것에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미 없는 생물을 혐오하던 신이치는 시간이 갈수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동화되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가축을 아무런 죄책 감 없이 먹는 인간과 기생생물의 차이가 과연 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인간의 잔인함이 더욱 부각되고, 인간을 연구하던 기생수는 "악마가 있다면 인간이다"라는 말까지 하는데, 이 말이 너무 설득력이 있습니다. 동족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엄청난 혐오를 느끼지만,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생물 순위에는 항상 사람이 있습니다. 가축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로지 높은 생산성만을 고려하여 학대와 살육을 반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TNjb1G-fxw

모든 기생생물이 머리가 좋고 냉정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 떨어지는 머리의 기생생물은 살육만을 즐기다가 인간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연구되고 파헤쳐지고, 결국 인간의 역습에 그 무시무시해 보이는 기생생물들이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살아남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기생생물은 더욱더 깊이 숨어 인간과 공생할 방법을 찾습니다. 인간을 연구하는 머리가 좋은 기생생물인 타미야 료코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기생생물과 닮은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워낙 오래전에 읽은 만화책이라서 찾아보았더니 2014년에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어 보았습니다. 중간중간 좀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납득이 가지 않게 주인공이 흥분하는 장면들이 조금 보기에 거슬렸지만, 제가 예전에 느꼈던 기생수의 메시지가 잘 느껴졌고, 전투 장면이나 감정 표현도 잘 되어있어서 완성도도 높았습니다. 특히 처음에 무시무시하고 끔찍하던 기생수가 점점 더 귀여워지는 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몰랐는데 신이치는 여자들한테 참 인기가 많았네요. 맨날 감정이 오락가락하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도 아주 보는 여자들마다 반하네요. 부럽게.




제가 어린 시절에 일본 만화는 거의 절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지하철에서 어른이 출퇴근하면서 만화책을 본다는 일본을 상당히 부러워했습니다. 일본 만화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많은 지지에 힘입어 정말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도라에몽 같은 명랑만화부터, 총몽,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철학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린 만화, 동화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부터 에반게리온 같은 초유의 덕후를 양산하는 애니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멋지다 마사루나 이나중 탁구부 같은 병맛 만화도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조금 요즘 만화를 보면 만화를 그리는 것을 소재로 한 바쿠만이라는 만화도 있습니다. 한참 일본 만화가 유입되던 당시 선정성과 폭력성 논란이 많기도 했지만, 금기 없는 다양한 상상력이 반영된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경기의 영향인지 확실히 예전만큼 참신한 일본 만화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웹툰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발전과 경기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점점 더 다양하고 많은 만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 세대는 일본 문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세대였다면, 이제는 충분히 좋은 국내 콘텐츠가 많아졌습니다. 하나 바라는 것은 과거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사태같이 말도 안 되는 탄압으로 작가의 창작을 제한하는 사태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야하지만 참신한 하일권 작가의 스퍼맨 같은 작품도 제한 없이 안정적으로 다양성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기안84 논란을 비롯하여 지나치게 여러 작품에 특정 프레임을 씌워서 비난하여 작가의 창의력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자 아이러니하게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과거에 제가 쓴 글도 있습니다.

https://brunch.co.kr/@gjchaos0709/121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와 우리가 말하는 정의가 진짜 정이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었던 여운이 긴 만화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 세계 2020년 키워드를 장악학 코로나와 기생수는 닮은꼴입니다. 결말을 스포 하자면 기생생물은 결국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은밀하게 생존하게 되죠. 한참 난리인 코로나도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여러 연구를 거치다 보면 결국 감기 바이러스처럼 인간과 조용히 공생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때는 아주 징글징글했던 2020년을 군대 이야기처럼 후대에게 전해주는 라떼 콘텐츠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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