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 몰라, 난 그만둘 거야

by 지제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란 한국 영화를 아시나요.

우연히 영화를 보던 중 저는 한 장면에서 헉! 하고 마음이 묘해진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여상 졸업 여직원들의 일상이 스케치되며 시작합니다.

여직원은 평소처럼 제일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섭니다.

그리고는 멈칫 표정이 굳어지면서 한숨을 내쉽니다.

여직원이 본 것은 회의용 테이블에 널려진 술병과 안주, 담배꽁초 등 술자리 잔해입니다.

화악 감독님께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인터뷰를 해준 적도 없는데, 어쩜 저렇게 똑같이 찍었을까. 내 표정도 저랬을까.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20대 초반, 저는 백화점 쇼윈도나 브랜드 매장 디스플레이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회사에 다녔습니다.

대표님, 이사님, 부장님,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들, 그리고 경리 사원인 저까지 포함해 1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회사로, 위치는 강남에 있었습니다.

대표님과 디자이너들은 모두 여자였고, 제작하는 부장님과 영업 이사님만 남자였어요.


디자이너들은 강남에서 강남으로 출근했고

저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출근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시안 스케치를 하고 도면을 그리거나 전시를 보러 다녔고

저는 청소를 하고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고 은행에 다녔습니다.


지방대 나온 디자이너는 명문대 나온 디자이너가 실력 없다고 투덜대고

명문대 나온 디자이너는 유학 갔다 온 디자이너가 일을 못한다며 고개를 흔들고

대표님은 이번 달도 적자면 남편이랑 시댁에서 더 이상 지원을 안 해줄 거라며 울상이고

영업 이사님은 대표실에서 얼굴이 벌게져서 나와 담배부터 집어 들고

거의 알코올 중독이자, 대표님의 형부이기도 한 부장님은 내일 꼭 갚을 테니

대표한테 말하지 말고 5만 원만 가불해 달라고 저에게 손짓, 눈짓을 하는...


뭐 대략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래도 한 명 한 명 떠올려보면 딱히 나쁜 사람은 없었지 말입니다.

우짜둥둥 저야 전표랑 통장이랑 현금이랑 딱 맞으면 되는지라

지하철에서 소설책이나 읽는 걸 낙으로 삼으며 재미없는 출퇴근을 했었습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청소하고 커피 내려놓기!

요즘은 모르겠는데 그 시절에는 고졸 경리 사원의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역시나 그날도 8시 30분경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미친... 이게 뭐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장면이 제 안구로 쫘악 들어왔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반은 걸레처럼 찢어진 신문지가 넓게 깔아져 있고,

그 위로 국물만 남은 사발면들, 국물 위로 나무젓가락과 담배꽁초가 둥둥 떠다니고,

허옇게 발골된 치킨 뼈다귀와 소줏병들, 과자 부스러기와 종이컵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밤새 방치된 음식 쓰레기와 담배꽁초 냄새는 사무실 전체를 전내로 진동하게 했습니다.

족히 5명 이상이 먹은 건데. 그중 누구도 이걸 치울 정신은 없었던 건가.

고로, 나보고 지금 이걸 치우라는 건가.

모욕감마저 들었습니다.


영화 속 쿨한 여주인공은 머리를 질끈 묶고 바로 치우더군요.

저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1. 그냥 다시 나간다. -> (이런 꼴은 못 본다. 그만두겠다.)

2. 눈 딱 감고 치운다. -> (서럽지만 이깟일로 실업자가 될 수는 없다.)

3. 보란 듯이 그대로 놔둔다. -> (대놓고 나한테 뭐라고는 안 하겠지만 서로 불편해진다.)

결국 제 선택은 2번이었습니다.


한 시간쯤 후 하나 둘씩 출근했지만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습니다.

누구도 미안하다 하지 않았고, 다들 커피 한잔 들고 자기 자리로 가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부장님만 머리를 긁적긁적 "어유... 치웠구나..." 하며 좀 안절부절못했던 거 같기도.




딱히 그 일이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후 저에게는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걸을 땐 거리의 간판들을, 지하철을 타면 구석구석의 광고들을 훑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미용실, 카페, 부동산소개업, 깁밥집, 안경집, 서점, 옷가게, 슈퍼마켓, 꽃집...

세상엔 참 다양한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 직업을 선택하게 된 걸까.'

'나도 전문직을 갖고 싶다. 나도 무엇인가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 6개월은 간판만 보며 다닌 것 같습니다.

(아! 경리회계 업무도 전문 분야입니다. 저에게 한정된 이야기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어느 날 지하철 내부 광고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신문 출판 편집자, 교정 전문가 양성 학원]

순간 저거다! 싶었습니다. 평소에도 일상이 버거우면 책 속으로 도망을 치곤 했던 저는 출판 일이라면 자부심을 갖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환경에 몰려서 먹고살기 위해 취직을 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설렜습니다.




6개월을 고민했다고 하자, 대표님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직원을 구하겠으니 인수인계만 잘해달라고 했고, 며칠 후 대표님은 지인을 통해 소개를 받았다며 후임으로 들어오는 분과 인사를 시켜주셨습니다.

20대 중반의 제 또래, 유난히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지닌 호감형 미인이었습니다.

하얀 피부와 어울리게 성도 설씨여서 우리는 '미스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스설은 전혀 이 업무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본인 숫자 개념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업무 전반에 대해 몇 번을 설명해도 이해를 못 했습니다.

공과금과 교통비가 헷갈린다 하고, 은행은 혼자 가기 싫다 하고, 단순 계산도 한 번에 맞는 법이 없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오늘 열 번 설명을 해도 다음 날이면 한 번도 못 들은 사람처럼 다시 백지가 되어 나타나니,

처음엔 나를 놀리는 건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설명을 자꾸 하게 하는 것에 미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말로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곤 하는데,

한 번은 반복 설명에 지쳐 제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을 때였습니다. 뜬금없이

"내가 남자친구가 있거든. 근데 그 사람 나이가 쉰 살이야. 그래서 빨리 결혼하려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스설이 커피를 마시다 자기 상의에 주룩 흘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부장님이 본인이 모르는 줄 알고 "미스설, 셔츠에 뭐 흘렸네." 하며 알려주셨는데,

"이거요? 원래 무늬예요?"라며 정색을 하는 거였습니다.

엥...! 모두 어이없어했지만 그녀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부장님을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아, 무늬구나. 쏘리."

부장님은 휙 돌아섰고 황당해하는 표정이 뒤통수에서도 느껴졌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이상한 나라의 미스설.

살다 살다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캐릭터 미스설.

저는 불길해졌습니다.

이러다간 내가 그만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스며들더군요.

'아, 몰라 몰라. 난 그만둘 거야. 무조건 나갈 거야.'

저는 귀 막고 눈 감고 몰라 몰라를 외치며 미스설이 이해를 하든 못하든 진도를 나갔습니다.

학원 등록도 마쳤고, 무엇보다 막상 그만두기로 하고 나니 하루라도 더 나오기 싫었습니다.


"미스설은 어떠니? 잘해?"

일주일에 한 번쯤 대표님이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내가 바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네. 잘하고 있어요."


지금은 내가 옆에 있으니 의지하는 거지, 미스설도 막상 내가 없고 이젠 진짜 자기 일이다 싶으면 점점 잘하게 되지 않겠나. 그렇게 믿어 버렸습니다.




나만을 위한 마인드컨트롤 '몰라 몰라' 전법은 통했고, 저는 기필코 회사를 나왔습니다.

일말의 찜찜함은 다 털어버리고, 그들의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새 출발을 하기로 했습니다.

왕복 3-4시간, 강남까지 출퇴근 안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던지요.


그래서 미스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한 달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역시나 찜찜함은 그냥 지나가주지 않았고, 저는 대표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잘 지내니? 편집 학원은 재밌어?"

인사부터 건네신 대표님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1. 미스설이 그만두었어. 일이 어렵다고 하더라. -> (너도 예상했던 일이잖아.)

2. 회사에 한번 와. 맛있는 거 사줄게. -> (니 책임도 있지 않니? 어떡할 거야?)

( )은 물론 제가 해석한 대표님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전 직장의 상황에 자유로울 수 없던 저는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뻔히 보이는 걸 외면했던 대가는 반드시 치러지게 되는구나.'

하며 터덜터덜 다시 대표님을 만나러 가야 했습니다.


대표님이 원하는 조건은 이랬습니다.

1. 편집학원 다니면서 일주일에 2-3일만 일을 봐달라.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게 해라.

2. 회사는 그 사이 직원을 구해보겠다.

3. 새 직원이 오면 인수인계를 다시 해달라.


저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대표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무책임하게 나간 저에게 섭섭했다 소리 한번을 안 하시더라고요.

두 달 후쯤 정말 괜찮은 분이 새로 들어왔고, 저는 마음 편히 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왜 그랬나 싶습니다.

미스설의 성향은 며칠 만에 다 파악했는데, 왜 바로 다른 직원을 구하는 게 낫겠다고 말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나도 회사도 미스설도 서로 좋았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서는 남이야 곤란에 처하든 말든 모른 척하고 싶은, 이기심이 작동한 거겠죠.

"몰랐어요."라고 말하게 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정말 몰랐을까 되묻게 되는 일요.

나를 위해, 혹은 내 가족, 내 조직만을 위해, 안될 일인 게 뻔히 보여도 '난 몰라 몰라' 했던 순간들.

그 이기적이었던 순간들을 다 헤아릴 수나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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