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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달과 풀 Dec 02. 2022

D-day 29일

눈이 온다.

많이 온다.

펑펑 온다.

회색하늘에서 눈이 이렇게 오면 금방 쌓일 것 같다.  첫눈이 이리 펑펑 내리니 나는 행복하면서 슬프다.  이 눈을 올겨울 다 못 보고 떠나야 한다니..

그리고 소복한 눈밑에서 연한 연두빛으로 올라올 전호나물을 맛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아쉽다.  그렇게 오늘 아침 나는 이별을 고할 마음의 준비를 또 해야 한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즈음에 퇴근후 홀로 봉래폭포 아래 계곡옆 산골짜기에는 산기슭을 따라 마치 밀림지역의 그것처럼 거대하게 자란 고사리와 안개꽃처럼 잔잔한 하얀 전호나물 꽃이 바람에 일렁인다. 나는 이제 더이상 볼 수가 없다.

한참을 서서 물끄러미 바람에 일렁이는 전호나물 하얀 꽃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세상에 혼자뿐인 듯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있었었다.  

내가 느끼는 행복은 비싼 보석을 내 몸에 칭칭 감았을 때도 아니고, 비싼 가방을 들었을 때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 때도 아니고, 이렇게 나의 영혼을 충만시켜주는 야생의 멋진 자연을 볼 때 지극히 행복감을 느낀다.

어떤 이는 말한다.

이 섬에는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쇼핑센터도 없고, 물가는 비싸고, 영화관도 없고, 없는 것 투성이인데다 육지에 가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나는 말한다. 육지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이곳에 너무 많다고...

육지에서 자라지 않는 이름없는 여러종류의 꽃씨를 바람이 퍼트리고 비옥한 토지가 품어 안아주고, 충분한 햇볕이 따스하게 지켜봐준다.  그래서 이곳의 풀들은 자연의 풍부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 그렇게 자란 풀들과 꽃들과 나무들은 육지에 비해서 훨씬 건강하고 푸르고 아름답게 자란다.

겨울 눈밑에서도 생명은 죽지 않고 다만 기다릴 뿐이며, 눈밑에서도 싹을 틔우고 줄기를 뚫고 나와서 꽃을 피운다. 그렇게 처음 피는 전호나물 꽃을 시작으로 이름 없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기 시작한다.  섬초롱꽃이 내 사무실 옹벽 모퉁이에 펴있는데 이 꽃도 지금은 지고 말라죽은 듯이 짙은 고동색인데 봄이 되면 분홍초롱꽃을 이쁘게 피운다.  

생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이 아니다.

두텁게 쌓여진 눈 밑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옹벽 차가운 돌틈안에서 겨울 내내 꿈을꾸다가 봄이 되면 기다린 듯이 성질 급한 꽃들은 차가운 눈을 비집고 고개내밀고 세상구경을 하러 나온다.

이곳 섬은 육지에 비해 훨씬 생명력이 왕성하다.

내일은 이곳 깃대봉을 다녀올 생각이다.  

성인봉을 가보고싶은데 힘들다고 하니 깃대봉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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