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1
토요일 밤 크루즈를 타고 섬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7시경.
밤새 배는 파도를 타는 듯 출렁거렸고, 잠결에서도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워낙 큰 배라서 배의 움직임이 잠들기 괴로운 정도는 아니었고 요람을 탄 듯 편안하였다.
밤 11시 50분에 출항한 배가 아침 7시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린후 마신 첫 공기의 싱그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그 공기는 육지에서 느끼기 어려운 맑고 싱그럽고 촉촉하며 시원하다.
코로 들이마신 공기가 폐에 들어가니 온몸이 상쾌해짐을 느낀다. 같이 온 선생님을 모셔드리고 집으로 왔다.
항상 그렇지만 내가 울릉도 관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샤워다.
육지의 먼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씻어낸다. 이 섬의 매끄러운 물에 육지의 먼지를 씻어내고 따스한 온수매트가 켜져있는 침대위로 올라가 다시 한 번 잠을 청한다. 크루즈에서 잠을 잘 잤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잠을 청하였다. 한참을 자고 깼을 때는 점심때쯤 되었다. 크루즈에서도 아주 잠을 잘 잤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와서 깊이 잠을 반나절을 더 잔 것이다. 작은 방안에는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와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가끔 집안에서 부는 바람에 벽에 붙어있는 종이가 펄럭이는 것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자유로이 제집 드나들 듯 하는 바람때문에 겨울이불 두개를 덮고 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마치 굶었다가 맛있는 밥을 먹었을 때처럼 머리가 흡족하고 피로가 싹 풀린 듯 하다.
역시 질높은 잠은 보약이다.
자고 일어나 휴대폰을 켜고 보니 문자가 와있다. "오후 1시에 저동약국앞에서 행남등대로 출발합니다." 같이 가자는 선생님 메세지다. 시간이 많지 않아 밥도 먹지 않고 대충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추운 날씨라 내복을 입고 김장담을 때나 입는 두터운 초록색 오리털 파카를 껴입고 길을 나섰다. 시간이 몇 분 늦을 것 같아 전화를 드리니 받질 않는다. 저동약국앞에 도착한 시간이 1시 4분이다. 고작 4분이 늦었는데 그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전화를 드리니 여전히 받지 않으신다. 시간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라 혼자 떠나신 모양이다. 나는 어차피 늦고 같이 못 갈 것 같아 점심이나 먹을 요량으로 약국옆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 양옆에는 식당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빼곡이 들어서있다.
정애식당을 비롯하여, 분식집, 닭집, 많은 식당들이 있다. 나는 이 골목을 울릉도의 명동이라고 내맘대로 이름지었다. 저동에서 가장 번화가이고, 밤이 되어서도 식당불은 켜져있기도 한다. 나는 식당을 둘러보다가 혼자 가도 반겨줄 곳이 어딘지 살펴보다 '삼시세끼'로 들어갔다. 개업한 지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하시고 반찬이 먹을만하다. 문을 빼곡이 열고 들어서니 사람이 몇 명 없다. 오른쪽 두번째 손가락을 펴서 입모양으로 "한사람도 돼요?"하고 여쭈니 웃으시며 백반은 된다고 하시며 앉으라고 하신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잡고 앉으니 다른 고객은 없고 주인 아주머니와 내가 테이블은 다리지만 마주보며 점심을 먹게 되었다.
따뜻한 숭늉을 컵에 담아주신다. 추운 날씨에 숭늉을 마시니 참 좋다. 목구멍으로 따스한 숭늉이 흘러들어가니 몸이 따스해지는 기분이다. 가끔 숭늉은 반찬보다 더 맛있다. 곧 나온 몇가지 반찬과 보글보글 끓고있는 된장찌게와 함께 밥을 아주 맛나게 먹고 있으니 그때서야 선생님의 문자가 온다. 저동옛길 산꼭대기에서 찍은 사진과 미처 전화를 못받았다는 메세지다. 그래서 나는 제가 늦어서 못뵙고 식당에서 밥먹고 있습니다. 하니 그럼 혼자 천천히 나중에 오라고 하신다.
나는 오늘은 혼자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밥을 천천히 먹고 숭늉을 비우니 커다란 컵에 또 김이 나는 구수한 숭늉을 또 가져다주신다. 그리곤 내가 산에 갈 예정이라고 하니 꽤 큰 텀블러에다가 숭늉을 가득 담고는 산에 가서 마시라며 주신다.
친절한 식당 아주머니가 주신 숭늉을 한손에 쥐고 혼자 천천히 골목길을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에 낡은 계단이 정겹다. 이 골목길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옛길이다. 예전 울릉주민들은 이 산길을 넘어서 저동에서 도동으로 넘어다녔다. 작은 마을 입구에는 옛길이라는 표시가 아치형으로 서있다.
그곳을 지나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경사로를 지나 산으로 접어들었다.
대나무터널을 지나서 행남등대로 가는 길은 경사가 좀 진다. 예전 처음 갈때는 숨을 헐떡거렸었다. 그런데 오늘은 워낙 거북이걸음으로 가니 조금 심장이 빨리 뛰는 정도다. 혼자 갈 때는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고 들으며 걷는다. 시간이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이승열의 세계 음악기행'프로그램이 흘러나온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이다.
가슴에 대각선으로 휴대폰을 가방처럼 매고 라디오를 트니 프랑스 샹송이 흘러나온다.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솜사탕같다. JYP 박진영이 늘 주장하는 공기반 소리반인 목소리다.
행남등대 가는 길에는 털머위가 오솔길 양옆에 자생한다. 그 털머위는 늦가을에 노랗게 군락을 이루며 펴있는데 늦가을에는 정말 화려한 노란 꽃길이 된다. 지금은 꽃은 지고 초록잎들만 남았고 드문 드문 지각해 핀 꽃 면 송이가 펴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꽃들은 지고 씨앗을 맺고 있거나 시들시들하다.
꽃은 화려하게 펴있을 대 절정이지만, 지는 꽃도 아름답고 꽃이 지고 씨앗을 맺은 모습도 아름답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 역시 가장 화려하고 이쁠 나이가 지나 얼굴이 주름이 지고 하얀 머리를 매달 염색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시들어가는 꽃을 보고 밉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털머위꽃에 비유하면 시들시들한 단계인 듯 하다. 그러나 시든 꽃들은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내일을 위해 씨앗을 퍼트리는 숭고한 모습이기에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래서 난 시든 털머위꽃도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답다고 혼자 강력하게 주장을 하면서...
행남등대 입구에 먼저 가신 선생님이 기다리고계셨다. 선생님은 행남등대를 이미 다녀오셨지만 나를 보시더니 다시 행남등대를 동행해주셨다. 안그래도 홀로 산길을 걷기 조금 두려움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행남등대에 가면 항상 조그만 강아지가 동행한 선생님을 졸졸 따라온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이 간식을 가져와서 그친구를 항상 나눠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더니 집에 줄로 묶어있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을 따라가고싶은지 꼬리를 흔들며 찡얼찡얼 똥마려운듯 짖어댄다.
행남등대에서 바라보는 저동과 앞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왔다.
그리고 늘 가던 도동으로 가는 해안산책로를 가지 않고 도동마을로 이어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바다날씨가 좋지 않아 해안산책로는 통제되었을 것으로 짐작을 했고 또한 안가본 길을 가보고 싶은 욕심에서다. 도동마을로 가는 길 입구는 대나무가 터널처럼 뚫려있다. 그곳을 지날 때 무슨 새인지 그 터널을 위아래로 파닥파닥 날개짓하며 통과하며 마치 나에게 길을 안내하는 듯 착각에 빠진다.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눈은 이리 내맘대로다. ㅎㅎ
터널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통해 오르막을 올라가니 중턱쯤 커다란 후박나무 두그루가 계단옆에 서있다. 후박나무 줄기는 산길을 닮았다. 구불구불하다. 그 줄기 표면은 매끈하고 아름답다. 산중턱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 길다란 의자가 있어 그곳에서 사과 하나를 깍아먹고 도동으로 내려왔다.
도동으로 내려오니 눈에 익숙한 골목이 나온다. 일주일 전 방문했던 법원과, 울릉군청이 있는 골목길로 빠져나오니 오늘의 등산은 끝이 났다 싶었다. 도동에 있는 찻집에 들러 마주앉아 쥬스를 한 잔 하고 일과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