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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달과 풀 Nov 13. 2024

머물고 싶은 시간

마음 안에는 슬픔인지 우울증인지가 조금씩 물결처럼 찰랑거리며 살고 있다.

그 슬픔은 사람에 대한 것인지 내 삶에 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가끔은 그 슬픔에 젖어 즐기고 있고, 가끔은 그 슬픔이 버거워 물 많이 먹어 썩어 늘어진 이파리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찰랑거리는 슬픔이 느껴져 퇴근 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을 생각뿐이었는데 집에 도착해 배고플 구피들에게 물고기 밥을 아주 조금 떠서 물 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주황색 물고기 밥이 물 위에 자잘하게 떠 있다가 일부는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여덟 마리였던 구피들 중 여섯 마리가 죽고 간신히 살아있는 구피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재빠르게 헤엄쳐서 올라와 물고기 밥을 입을 벌려서 먹고 있었다. 한 마리는 어디에 있는지 아직 밥이 온 것을 모르는 양 구석 어디인가 헤엄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구석에서 헤엄치고 있던 물고기도 올라와서 밥을 먹는다.  그 모양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실장님~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이제야 전화드려요. 저번에 보내주신 홍화가루는 우리 애에게 잘 먹이고 있어요. 애도 잘 먹고 있고 몸에도 좋은 것 같아 계속 달아서 먹이려고요.'

반가운 목소리다. 최근 그 집의 귀한 아들이 학교 소방훈련 중 떨어져서 척추를 세 군데나 부러져서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큰 모양인데 다행히 기운을 내고 있는 모양이다. 도움이 될까 해서 뼈 붙는데 도움이 된다고 들은 홍화가루를 부쳐주었고, 휴직 관련 법도 알아보고 나름 도움이 되려고 애를 썼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만 고마운 마음에 전화를 주었다니 기분이 좋았다.

그 친구는 다친 아이의 보상을 위해 손해사정인을 알아보고 그를 통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대한 미안함이 있어 마음 한쪽 불편함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랑하는 귀한 아이가 다쳐서 척추와 가슴등 여러 군데 다쳤고, 일부 성장판도 다쳤는데 보상을 받기 위한 소송에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또 불편하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 않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건 돈이 탐나서가 아니고 혹시 모를 아이의 장래에 필요한 치료와 그에 맞는 운동을 위해 꼭 필요한 돈이며 그것은 반드시 받아내야 되는 것이며 당연한 권리를 찾는 일에 불편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당당해져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내 말이 힘이 된다고 기록해 둬야겠다고 했다. 말이든 물건이든 시간이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피드백받았을 때 나는 큰 기쁨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 쓴 것이 작은 도움이 되었다면 그 친구의 내가 그에게 도움 된다는 피드백이 또 나를 힘나게 하는 도움 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어제는 벨리댄스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 후배와 전화를 끊고 학원으로 갔다.  먼저 온 학원생 한 명과 원장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벨리댄스를 배우는 그 학원생은 다음 주 화요일이 출산예정일이라 배가 많이 나온 상태였다. 그녀는 임신을 했어도 늘 춤추는데 게을리하지 않고 전면 거울 앞에서 춤을 아주 귀엽게 잘 추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만삭의 배를 하고 벨리댄스를 추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함께 춤을 추는 일은 참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흐뭇했다.

다음주가 출산예정일인 그녀는 자축하기 위해서 케이크와 커피, 자몽, 녹차  등을 사 왔다. 춤추기 전 학원생들이 다들 모여서 배를 훤히 드러내놓고 학원 바닥에 다리를 펴고 둘러앉아서 산모를 위해 다양한 조언들을 하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복장은 다들 화려해서 핑크빛 너불거리는 치마, 쫙 붙는 검정 레깅스, 그리고 금빛의 구슬이 달린 허리에 감는 힙스카프를 둘러매고 불룩 나온 배들을 드러내고 앉아서 다음 주에 태어날 아기에 대해 다들 신이 났다.

"그 애 태어나서 울면 댄스음악 들려줘봐요. 울음을 뚝 그칠지도 몰라요."

"아기 낳을 때는 똥 누듯이 힘을 줘야 해요."

"복식호흡이 중요해요. 복식호흡을 하면 진통을 견딜 수가 있고, 산소공급이 잘돼서 아기도 잘 견뎌요."

"아기는 어디서 낳아요?"

"엄마가 운동을 열심히 잘해서 아기 금방 낳을 것 같아요."

"수유는 어떻게 해요? 모유랑 분유 반반 먹여요. 모유만 먹이면 황달이 온대요."

"밤에 모유수유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러니 우유도 함께 먹여요."

"조리원은 어디로 가요? 요즘은 얼마나 해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벨리댄스 추는 것 아니에요?"

질문도 끝도 없고, 조언도 끝도 없고, 그렇게 하하 호호 신이 났다. 한 사람은 아기 선물을 가져왔는데 하얀 천에 눈. 코. 입이 볼록볼록 나온 정말 귀여운 양말과 가제 손수건 세트였다. 그 양말을 보는 순간 모두 "와~ 너무 귀엽다."라며 감탄과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 나중에 섬에 가서 공연하는 것 어때요? 거기 공연을 하면 배값하고 숙식비는 지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열심히 해서 섬 공연가요."

그 말에 다들 신이 났다.  그리고 케이크와 음료수와 왁자지껄 이야기 나누기 한 후 신이 난 상태에서 추는 춤은 유난히 흥이 났고 몸짓도 유난히 컸다.

살다 보면 딱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제저녁의 시간이 딱 그랬다.

그때의 감정. 그때의 흥겨움. 그때의 들뜸. 그때의 기대. 그리고 그때의 시간에 주고받은 따스한 말들!

그 시간에 나를 가둬두고 싶다.

그러면 내가 늪처럼 빠져들던 슬픔들이 다시는 기억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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