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성 식도염이 불러온 보상 폭식
브로콜리를 입에 넣고 씹자마자 목으로 뭔가 올라오면서 근육이 조여들기 시작한다. 목이 깔깔해진다.
아웃 아웃 브로콜리 아웃입니다.
김치 조그만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이번엔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손가락이 시린 느낌도 동시에 든다.
고춧가루는 조금이라도 묻어있으면 아웃.
김도 아웃, 기름 많은 것 아웃, 콩도 아웃. 콩으로 만든 두부도 당연히 아웃.
당근도, 너무 쓴 채소도, 버섯도, 너무 짜게 만든 음식도 전부 다 아웃이었다.
살아남은 재료는 소고기, 달걀, 삶은 돼지고기 정도였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음식을 골라먹느라 눈치를 보는 건 더 스트레스였다. 나한테 맞는 음식만 집중적으로 먹으면 역류성 식도염이 분명 나을 것만 같은데. 문제는 조카가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바이러스였다. 아기들은 무해했지만 아기들의 약한 면역력은 내겐 유해했다. 장염에 한 번씩 걸릴 때마다 밥을 먹는 게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본가는 아니었다. 모든 걸 다 해주려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애정표현보다 불안함으로 나를 키웠다.
이 집에선 내가 뭐라도 하려고 하면
“니 그러다가 또 허리 안 좋아질까 봐 겁난다. 비켜봐라 엄마가 할게”
한창 실랑이를 하면 결국 끝은 서로 짜증을 냈다. 가족은 대체 무엇을 위한 배려를 하는지 때론 모르겠다.
엄마 눈앞에 내가 없어줘야 엄마의 신경증도 줄어들 거다. 어쨌든 혼자 떨어져야 내가 근육을 움직이는 시간이 늘어날 거란 판단이 섰다. 한바탕 병원 전국투어를 돌고 와서 PT에 집중하고 나니 살만해졌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그때쯤 엄마가 갖고 있던 월셋집 세입자가 나간다는 사실을 들었다. 나와 아빠의 싸움이 보기가 힘들 정도로 극에 달했을 때는 엄마가 한번 이 집 얘기를 한 적 있었다. 그 사람이 나가면 네가 거기 가서 살라고.
하지만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나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겠다는 마음에 신이 절로 났다. 그런데 어렸을 때 엄마랑 등산할 때면 들어왔던 말을 또 듣기 시작했다. 아직 집이 준비가 안 됐단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거의 다했다.’
또다시 방 문을 닫고 들어가 있어야 했다.
왜 이렇게 무력할까.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겠지.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 내 집이 아니니 그렇지. 다이어리엔 ‘내 돈으로 나만의 공간을 꾸리고 싶다.’를 사무치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5살짜리 조카도 내가 밥 먹여주려고 하면 짜증짜증을 낸다.
내가! 내가 할 거야!
참내 네가 하도 안 먹으니까 맥여줬더니만. 괘씸한 녀석.
이렇듯 독립하고 싶은 마음은 5살부터 생겨났을 텐데 그로부터 벌써 25년이나 지났다. 여전히 조카와 동병상련 신세다.
엄마를 닦달하다 보니 이삿날은 다가왔다. 아빠는 내가 그렇게 기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정신없이 피곤했다. ‘빨리 쉬고 싶으니 얼른 내 집에서 나가 주었으면..’(애초에 니 집이 아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배은망덕하다는 거 안다. 그런데 효도고 착한 마음씨고 모두 건강에서 나온다. 정말 사회는 구성원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시키지 말고 근육운동을 시키자. 제발) 악당들을 전수조사해 보면 대부분 지병이 있는 게 틀림없다.
다음날 일어나서야 실감이 났다. 혼자 있을 때 고요한 이 기분. 이제부터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들로만 삼시 세 끼를 다 채울 거다. 인터넷으로 소고기 수육을 시켰고 쓱배송으로 생선도 2개 정도 야채는 양배추를 구비했다. 혹시 모르니 달걀도.
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 조용하다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빠의 유튜브 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밥 먹으면서 라디오를 스피커로 틀었다. 지역 라디오 아나운서님의 명랑한 목소리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다이어리를 오랜만에 빽빽하게 썼다. 계획이 재밌었다. 집을, 하루를, 식사를 내가 채우고 싶은 것으로 채우는 게 이렇게 신날 줄이야. 어렸을 때 블록으로 한 칸 한 칸 내 집을 만드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랬다. 독립이라기엔 부모님이 사다 주신 것들로 나는 재밌게 블록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신은 났다.
막 고삐가 풀리기 시작한 말처럼 시원스레 달렸다. 물론 잠시 다른 사람의 시점 특히 엄마 눈에서는 0.25배속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후 4시가 되면 방전 됐고 청소기를 한번 돌리면 겨우 의자에 앉아서 헥헥거렸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집은 엉망이 되고 밥이 없으니까. 다이어리는 더 빽빽하게, 매일 루틴을 고민하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뽀모도로 타이머로 채찍질했다.
동시에 폭식을 했다. 폭발적으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내게 맞는 음식만 먹기는 무슨, 2년 동안 입에도 안 댔던 온갖 가공품을 무시무시하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11살 때도 먹은 적 없던 햄버거 젤리 같은 정체불명의 불량식품까지 섭렵했다. 너무 피곤했다. 강박적인 몸의 피로감은 머리의 절제 능력을 삭제시켰다.
그렇게 밤새 멍하니 먹고 나면 그다음 날도 피곤에 절어 정상 식사를 못 했다. 목이 차오른 순간을 넘기면 또 욱여넣었다. 소화될 때 더부룩하고 아픈 느낌을 견디지 못해 음식을 찾아 배회했다. 샌드위치, 돈카츠, 햄버거, 그리고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2년 사이 점점 바깥세상에도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우리는 점점 각자 벽 안에서 고립되어 가는 중이었다.
더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일정하게 바깥에 나가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치료라는 임무가 끝난 나는 쾌락추구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언니의 정보에 따라서 취업지원제도로 마케팅과 AI 수업을 들었다. 당근에서 모임을 찾았다. 책을 읽었고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말했고 또 나눴다. 가공품 대신 찾은 건강한 디저트가게의 사장님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과 오로지 대화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피티 선생님한테 운동을 같이 할 회원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글을 쓰는 모임에 들어갔고, 내가 아팠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알바도 시작했다.
어떤 시기는 폭식에서 완전히 해방됐는가 하면, ’또 이러네 ‘ 싶은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하루는 새벽 1시가 되도록 어김없이 과자 파티를 열고, 몰려오는 현실 감각에 지쳐 나가 있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타임머신은 가동됐다. 그곳은 10년 전 내 방 안, 시간은 자습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12시 30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