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인간의 삶을 비교하면, 누구의 시간이 더 본질적일까요?
소로는 숲에서 시간과 영원을 묵상했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소로가 숲에 들어온 이유는 명쾌했다. ‘더 깊은 물’을 마시고, ‘영원’을 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로의 ‘영원’은 관념에 머물거나, 추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오솔길을 걸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서 ‘뿌르륵, 뿌르륵’ 산비둘기가 울었다. 비둘기는 열차처럼 달리지 않았다. 그 위로 내리는 가을 햇살도 그랬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풍뎅이도 앞만 보며 살진 않았다. 그들은 월든의 숲, 월든의 자연과 소통하며 살았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도 월든의 호수는 ‘본래의 온전함’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소로는 자연을 통해, 호수를 통해, 숲을 통해, 다람쥐를 통해 그런 온전함 속으로 녹아들고자 했다. 그것이 소로에겐 수행의 길이었다. 다시 말해 신(神)을 만나는 통로였던 셈이다.
출처 : 백성호, "미국에 부는 영성(靈性) 바람 <중> 되살아난 『월든』의 힘", 중앙일보, 2011.10.26, https://www.joongang.co.kr/article/6507722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의 정신적 독립선언을 주창하고 소위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아주 미국적인 사상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03~1882)이다.
그는 자연이 곧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구현이라고 보았다.그는 인간의 직관과 창조력을 믿었으며,인간의 영혼이 개인을 초월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신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그는 미국의 정신문화가 유럽의 전통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유럽의 문명과 대조적인 미국의 자연을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야할 새로운 성서 로 격상시켰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생명체 속에 숨어있는 단일한 정신적 힘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거대한 영혼 이라 불렀으며,그 거대한 영혼 은 언제나 선하다고 믿었다.
출처 : "[미국문학기행 3] <에머슨> 자연에서 찾은 '초월주의'", 부산일보, 2009.02.14, 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80326000842
에머슨과 만난 1837년 10월22일 이후, 소로는 변했다. 고독한 다락방과 글쓰기 도구인 펜을 갖춘 소로는 ‘하버드 졸업생’에서 “자기 수양”을 거치는 초월주의 수련가가 되었다. 에머슨과 소로는 평생 애정과 격려, 대립과 분노, 화해를 되풀이했다.
소로의 동료들로는 ‘초월주의의 교황’이던 윌리엄 엘러리 채닝(1780~1842), 미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마거릿 풀러(1810~1850), 사상가이자 교육가 브론슨 올컷(1799~1888) 등이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초월주의자들은 문예지 <다이얼>을 발간하고 “내면에 신의 원리가 거주하고 있다는 믿음”을 널리 알리려 했다. 노예제 폐지와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불평등 종식은 그들의 중요한 목표였다. 적어도 6개 언어를 읽을 줄 알았던 소로는 <논어> <사서> <묘법연화경>과 고대 힌두 경전, 조로아스터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고 종합해 고대의 영적 전통을 되살리려 했다. 소로가 동양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45년 3월부터 2년여 동안 월든 호숫가 숲속 오두막에 살면서 그는 “말이 아닌 몸으로 글을 쓰고” 지냈다. 집은 백송으로 만든 사원, 식사는 성체를 드는 것에 비유했다. 생태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그는 생태주의의 원칙을 세웠고 채식주의자들이 많지 않던 시절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삶의 가닥을 잡았다. 때로 우울하고 자주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수탉처럼 만만하고” 확신에 차서 으스대는 떠들썩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이를 가리켜 “거대한 도플갱어”라고 표현한다.
출처 : 이유진, "온전한 삶을 영위한 인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한겨레, 2020.09.18,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62670.html
우리는 빠르게 살고,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본질적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요?
빠르게 움직이며
순간을 차지하는 인간의 시간일까요,
아니면 느리게 뿌리내리며
세월을 관통하는 나무의 시간일까요?
소로, "초월주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Thoreau)는 내면에 신의 원리가 거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숲에서 보낸 한 시간은
도시에서 보낸 하루보다 깊으며
느림 속에서 존재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시간은 결코 늦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충만함입니다.
생활 속 실천
가까운 곳의 나무 한 그루를 정해
1년 동안 관찰해 보세요.
사계절의 변화를 기록하며,
나무의 느림과 나의 속도를 비교해 보세요.
어느 순간, 나무의 시간 속에서
내 삶이 조금 느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