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우는 반려 식물은 ‘내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생명일까요?
레비나스의 철학은 절대적 타자의 철학이지만, 그 출발점은 ‘주체적 자아’이다. 제1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형이상학적 욕망의 주체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익명적 있음(il y a)의 무규정적 세계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고 소유하게 된 주체적 자아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 절대적 타자의 무한성을 욕망하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모험2)의 여정을 그린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를 향한 과정은 두 단계의 모험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단계의 모험은 익명적 있음의 무규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체의 자기 정립(hypostase)3)의 존재론적 모험이다. 그 모험에 이은 두 번째 단계의 모험은 이렇게 확립된 주체가 자기의 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형이상학적 모험이다. 이 모험의 각 단계를 레비나스는 현상학적 기술을 통해 재구성한다.
2) 레비나스에게 존재론은 주체적 자아의 한계 내의, ‘내재성의 영역’에 매어있는 동일성 철학을 의미한다. 반면 형이상학은 이 내재성의 한계를 넘어서 무한성을 열망하면서, 동일성 철학을 극복하는 철학적 물음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차원에서의 주체적 자아의 모험을 전제로한다. 주체적 자아는 일차적으로는 내재성의 동일성 철학으로 자기를 확립하고, 외재성-무한을 향한 열망으로 이 동일성 철학의 한계를 넘어 타자에게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정태적 구조가 아니라, 역동적 모험으로 그려진다.
3) hypostase를 고대 그리스어 hypostasis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의 라틴어 역은 substantia, 즉 실체이다. 그러나 실체가 ‘모든 변화하는 속성들과 과정들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존재하는 것의 토대’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서양 철학 개념사적 전통에서 보자면, 실체라는 번역어는 레비나스의 철학에서는 부적합하다. 강영안은 이 개념을 ‘홀로서기’라고 번역한다. 이 글에서는 서동욱의 번역을 따라 ‘자기정립’이라고 쓴다.
출처 : 김애령 (2008). ‘여성’, 타자의 은유: 레비나스의 경우. 한국여성철학, 9, 77 - 102.
레비나스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에 대한 신뢰로 인해 근대철학이 전체성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존재론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고 근대적 주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지만 분리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존재를 분리해 존재의 익명적 상태에서 출발한다. 비인칭적이고 익명적인 존재, 우리가 ‘그저 있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존재일반을 일리야(l’il y a)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존재자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홀로 있는 주체, 이포스타즈(hypostase)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고독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고독한 상태로 출현하는데 이것은 타자의 결여 때문에 느끼는 고독이 아니라 실존적 익명성 때문이다.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간이 시작되고 미래가 주어진다.
출처 : 박예은. (2016).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와 제3자의 정치철학. 인문논총, 73(1), 307-336.
근본적으로 주체는 타자에 대해 우월하거나 대등한 지향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타자에게 볼모로 잡혀 있거나 타자와 불평등한 관계, 즉 ‘비-대칭적’ 위상에서 타자에게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다. 타자는 주체의 존재현실이다. 타자로 인해 빚어지는 상황들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이유에서든 주체의 존재이유가 되며 그렇게 때문에 타자에 대한 책임성은 가장 오래된 경험, 그 어떤 경험보다도 앞선 수동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있어 책임성이 도덕적 의식이나 윤리적 명령으로부터 의무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출처 : 윤대선. (2019). 레비나스의 주체와 초월성 - 죽음 너머의 나와 타자 사이 -. 철학논집, 56, 173-203.
많은 사람들이 반려 식물을 ‘내 소유’라 여깁니다.
하지만 식물은 스스로 빛을 받고,
물을 흡수하며, 자라납니다.
나는 단지 그 성장 과정에 동행할 뿐입니다.
식물은 소유물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레비나스, "타자"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타자와의 만남에서 시간이 시작되고 미래가 주어진다."라고 했습니다.
타자는 주체의 존재현실이고,
타자로 인해 빚어지는 상황들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이유에서든 주체의 존재이유가 됩니다.
반려 식물도 바로 그런 타자입니다.
생활 속 실천
식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세요.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관계 맺는 존재로 다가올 것입니다.
나의 물주기와 돌봄은 지배가 아니라,
타자를 존중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