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를 가진 아이
언젠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위버멘쉬(독일어: Übermensch)다.
위버멘쉬(독일어: Übermensch)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이다. 위버멘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자'라고 생각한다.(이 생각의 출처를 알고 싶으면 '진정한 자유'글을 보기 바란다.)
위버멘쉬란 어원으로 볼 때 '넘어선(über) + 사람(mensch)'을 뜻한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사람의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이의 세 단계로 분류한다. 낙타는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가게 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사자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따라가기만 하는 것을 벗어나 반항하기 시작한다. 사자는 종교와 도덕이 하라는 대로 살아라는 용(드래곤)의 강압에 맞서 부정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반항만 할 줄 알 뿐이어서 그것에 고통과 허무만을 느끼지, 그것을 긍정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마침내 아이의 단계에 이르러서 사람은 삶을 놀이로 파악하고 그것을 즐기게 된다. 끊임없는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여기서 아이의 단계가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된다.
낙타와 사자, 아이의 비교를 좀 더 해보겠다. 니체는 사자가 자유로워 보일지는 몰라도 삶이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사자는 낙타처럼 비굴한 노예는 아니지만 부정하는 법만을 알고 있을 뿐, 삶을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자는 긍정하는 법을 모르기에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이때 필요한 정신이 바로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어린아이는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사자처럼 신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고 어린아이는 신을 보고 웃음을 지을 것이다. 사자는 신과 힘겹게 싸우지만 어린아이는 신과 재미있는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사자는 자신의 운명에 반항하지만, 어린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길 바란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이다.
나의 경험에 빗대어 보겠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다.(지금도 가난하다.) 어렸을 땐 가난한 나의 삶이 정말 싫었다. 너무 싫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한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가난하게 태어난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가수 vaundy의 노래 '벌거벗은 용사'에는 쏟아진 저주도 전부 사랑했다는 가사가 나온다.(쏟아진 저주를 가난하게 태어난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걸그룹 블랙핑크의 로제의 솔로곡 'on the ground'에는 노력하여 정상을 찍었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내 안에 있었다고 나온다.
가난한 나의 삶이 싫어 부자가 되는 삶을 꿈꿨던 그때의 나를 난 사자였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자였던 시기에서 벗어나 나의 운명, 나의 삶을 긍정하고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미술 전시를 본 것이었다. 무슨 전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젠가 내가 미술 전시를 봤을 때 황홀했다. 모든 것을 잊고 무아지경의 세계에 진입한 것 같았고, 나는 평생 미술 전시를 보러 다닐 것이라고 맹세했다. 또한 나는 갤러리를 차리고 싶었다. 갤러리를 차리고 싶었던 이유는 미술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하니, 갤러리를 차리는 것을 목표로 미술 전시를 보러 다닌다면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가 되는 삶을 꿈꿨던 이유는 남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의 나는 열등감이 없고, 과거에 나의 운명을 원망했던 나 또한 사랑하게 되었기에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한 위버멘쉬처럼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진정한 자유를 가지는 것은 평생 노력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향해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노력의 자유, 그리고 실패의 자유가 있으니.)
이 글을 보는 독자분들이 나처럼 위버멘쉬를 재정의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