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들은
'어, 우리 애 혹시 천재 아냐? 왜 이렇게 똑똑해.' 콩깍지 필터가 씌는 시기가 꼭 있다.
한두 번 알려준 동물 카드를 단어만 말하면 척척 가져오며 맞춘다던가.
엄마, 아빠 단어를 내뱉기 시작하더니 말로는 못 이길 정도로 제법 그럴싸한 문장으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던지. 고사리만 한 손으로 공을 던지는 자세나 정확히 공을 향해 뻗는 발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던가..
특히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 모든 환경이 신기하고 호기심 가득하듯이, 부모도 내 아이가 내뱉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게 된다.
남편과 나 역시 천재 콩깍지 필터 까지는 아니어도 아이가 제법 어휘력도 풍부하고 인지하는 부분이 영특하다고 팔불출 엄마 아빠 둘이서 서로 아이 칭찬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이와 놀던 남편은 그런 아이가 제법 신기했는지
"빈아, 빈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라며 지금 생각하면 직업이 뭔지, 세상에 어떤 다양한 일이 있는지, 아니 하물면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해보지 않은 세 살 아이에게 무슨 생뚱맞은 질문이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와 남편은 내심 아이의 대답이 기다려졌다.
그런 우리에게 아이는
"음... 빈이는 커서 빈이가 될 거야!"
순간, 남편과 나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거 같이 어안이 벙벙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래, 빈이 말이 정답이다. 빈이는 빈이답게, 빈이가 되어가는 거야!!"
세 살 아이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답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에겐 우문현답이었다.
우리는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자유롭게 자랐으면 좋겠어.라고 곧잘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우리의 육아에는 우리 각자의 어린 시절의 욕심과 지금의 결핍이 아이에게 투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누리고 싶었던 것, 나에겐 부족했던 것..
그래서 아이의 선택을 대신해 주거나 아니면 아이가 직접 부딪히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 버렸는지도...
고작 세 살 아이의 티 없이 맑은 대답이 앞으로 아이가 커감에 있어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밤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체능도 잘해야 하고 사회성도 좋아야 하고 외모 관리도 필요한 만능을 요구하는 시대...
비슷한 또래의 아이,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만나면서 나는 과연 나의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흔들릴 때도 있고, 헷갈릴 때도 있겠지만 아이가 어린 시절 우리에게 했던 대답을 잊지 않으려,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의 성향과 기질, 재능 그 넘어 아이가 삶에서 택하게 될 수많은 선택과 기로에서 000 답게 클 수 있게, 000이라는 자아를 완성해 갈 수 있게, 000이라는 한 인간의 삶이 풍성해질 수 있게 부모로서 인생을 조금은 앞서 겪고 있는 선배로서 응원해 주고 싶다고..
아이도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흔들리고 깨지고 아프더라고 항상 기억해줬으면 한다.
꼭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려 너를 잃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너는 너대로 특별하고 아름답다고, 엄마 아빠에게는 이 세상에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눈물 나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너무 많이 안 예뻐도 된다.
그렇게 꼭 잘하려고만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모습 그대로 너는 충분히 예쁘고
가끔은 실수하고 서툴러도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다
지금 그대로 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라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도
너는 가득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나태주 - 어린 벗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