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의 추억
중간고사 시험이 끝나고 교수님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 자네, 도대체 뭐라고 적은 건가? "
교수님이 내미신 건 나의 시험지였다.
나의 얼굴과 귀는 단풍이 만개한 가을산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뭐라고 적었냐면...."
여름도 아닌데 나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 맺히면서 시험지 위로 나의 땀들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 자네는 이걸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도 글씨는 왜 이 모양인가?"
"......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에 악필인 데다가 왼손잡이라 책상이 불편해서 글씨가 더 엉망이 되었습니다. "
구차한 변명을 하는 내 모습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왼손잡이라고? 그리고? 책상이 왜?"
"아... 아닙니다. 교수님 다음부터는 또박또박 잘 적겠습니다."
그러고는 얼른 밖으로 나와버렸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사람처럼
나의 악필에 대한 책임을 책상 탓으로 돌리는 내 모습이 참으로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늘 나오던 드넓은 캠퍼스
낭만과 두근거림과 사랑이 오가는 대학교 생활
그렇게 부푼 설렘과 기대를 안고 낭만 가득한 밀레니엄 00학번 대학생이 된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는 순간 머리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직사각형이던 고등학교 책상과는 달리 대학교 책상은 ㄱ자 책상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서먹한 상태로 인사를 주고받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자연스럽게 강의가 시작되었고 다들 열정적으로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왼손잡이던 나는 ㄱ자 책상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100명이 넘는 학생 중에 왼손잡이는 나 혼자뿐이어서
그 누구도 책상에 대한 불평불만이 없는 아주 즐겁고 설렘 가득한 캠퍼스의 3월이었다.
분명히 드라마에서 보던 대학교는 길쭉한 책상들이었는데....
그렇게 대학교에 커다란 배신을 당한(?) 나의 수업 시간은 남들과 달랐다.
대학교는 고등학교와 달리 칠판에 뭘 적으라고 하는 친절한 설명도
유인물도 없이 오로지 교수님의 강의에서 핵심을 잘 파악해서
바로바로 필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공에 붕 떠있는 나의 왼쪽 팔꿈치는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나의 글씨들은 당연히 춤을 추면서 어디로 날아갈 듯 보였다.
그래서 원래 악필이던 나의 글씨들은 갈 곳은 잃은 지렁이들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나의 정신을 더욱 산만하게 만들어버렸다.
왜 나는 하필 왼손잡이라서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건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상이 학문의 크나큰 시작인 대학교 강의 실에 있는 건지.
이 책상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만든 건지.
필기를 할 때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었다.
강의실의 ㄱ자 책상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은 남겼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틀렸다는 걸까?
남들과 다른 소수들의 불편함이 어떤 것일까?
왜 왼손으로 글을 쓰는데 틀린 걸까?
그렇게 불평불만만 하기에는 나의 소중한 20대의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주어진 상황을 불평불만해서 뭐 하겠는가?
다른 누군가가 바꾸어주고 세상이 변화기만을 더 이상 기다리진 말아야지.
내가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이야말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닐까?
중간고사 시험을 치고 나서 악필에 대해 교수님께 다녀온 후
그때부터 난 적극적으로 ㄱ자 책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나만의 방법은
필기할 때 두꺼운 전공서적을 다리 위에 올리고 필기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니 필기하는 게 훨씬 편해졌다.
그러다가 가을쯤 강의가 끝나고 혼자서 밀린 필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분이 들어오셨다.
그분이 내가 있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고 강의실 뒤에 방치된 부러진 책상 3개를 수리하기 시작하셨다.
나도 다시 필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분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학생? 째비야?"
(째비:왼손잡이의 경북 지역 방언)
"아... 네..."
"글 쓸 때 불편하겠네."
"아... 네."
그렇게 말없이 나를 지켜보시던 그분은 별말 없이 다시 강의실 뒤쪽으로 가셨고
나는 다시 필기를 시작했고 10분 정도 있다가 강의실을 나오게 되었다.
일주일 뒤에 강의실에 역ㄱ자책상이 놓여있었다.
친구들은 이게 뭐냐며 신기해했지만 나는 바로 알았다.
일주일 전에 강의실에서 만났던 그 아저씨!!!
나의 불편함을 한눈에 알아보신 그분의 그 마음에 나는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내가 불편하다고 말도 안 해보고 혼자서 불평불만만 가득했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랬던 걸까?
이렇게 누군가의 수고로 왼손잡이용 책상이 뚝딱 만들어질 수도 있는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데도
나 스스로 왼손잡이라는 틀 안에 나를 가둬놓고 있었던 건 아니였을까?
이 감동적인 일로 인해서 학창 시절 받았던 차가운 시선에 갇혀 지내던
나는 따뜻한 세상 밖으로 드디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추억의 ㄱ자 책상은 내가 대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ㄱ자 책상이 가끔씩 생각이 날 때면 그분이 생각이 난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의 그 수고로움에서 저는 배려라는 커다란 인생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