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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댄 Dec 05. 2020

십만 원

애인에게 돈을 빌렸다.


십만 원. 최대한 가볍게 들리도록 말을 꺼냈다. 사실 만나기 전부터 해야지 다짐했었다. 냉면을 먹으러 대흥으로 가던 버스 안이었다.

“나 부탁이 있어.”

“뭔데.”
“십만 원만 빌려 줄 수 있어? 8월 1일에 갚을게”
“아 당연히 빌려주지.”
“고마워. 그럼 혹시 천만 원도 빌려 줄 수 있어?”
“그건 안돼.”
“안 넘어온다.​“

사실 천만 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걱정 없이 애인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입 안에서 오래 우물거려야 했던 십만 원에 비해 천만 원은 발음하기가 쉬웠다.

준비하던 시험을 접고 맞이한 아침은 감옥 같았다. 얇은 지갑을 들고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매일 커피를 사 먹는 게 부담이었다. 익숙하고 지루한 옷가지를 걸치고 다녔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데 투자하는 돈이 아까워 몇 번을 고민하다 결제를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오랜만에 다 같이 보자며 제주로 불렀는데 반가움보다도 부담이 컸다. 편도 십만 원 정도의 성수기 비행기 값과 십 년 가까이의 우정을 재고 있었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기 전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에도 월말에는 늘 쪼들렸다. 그럴 때면 보통 가족에게 용돈을 더 타내곤 했었다. 가족은 이해해줄 테니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집이 흔들리는 게 보이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네 기회가 올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족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애인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좀 더 편안해 보였다. 더 단단해 보였다.

냉면을 먹고 신촌으로 이동했다. 독수리다방에서 애인과 보드게임을 했다. 전쟁 게임이었다. 자꾸 졌다. 화나서 우는 시늉을 했다. 눈물을 닦는 것처럼 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정말 눈물이 나왔다. 나온 김에 울었다. 세상에 자꾸 졌다.


(2020.7.20)


지금은 취업했습니다. 여전히 지갑은 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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