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사위?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라는 말이 있다.
처가살이는 할게 못된다는 뜻과 함께 오죽하면 처가살이하겠느냐 정도의 의미가 숨어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할 수 없이 한다는 서글픈 뜻도 검색되었다. 그래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DJ이면서 가수인 옥상달빛의 노래 중에 ‘없는 게 메리트’란 희망적인 노래가 생각났다.
[나는 가진 게 없어 손해 볼 게 없다네 난
정말 괜찮아요 그리 슬프진 않아요
주머니 속에 용기를 꺼내보고
오늘도 웃는다]
가진 게 없어 손해 볼 건 없지만 빚은 지면 안된다.
빚이란 게 꼭 물질적인 것, 돈 만이 빚이 아니더라. 얹혀 산다는 마음의 빚도 항상 무거우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처갓집은 먼 곳에 있어야 하고 처가살이는 고달프다는 말이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어딘가에 비빌 똥꾸멍도 없어서 어딘가에 기대어 살아보진 못했다. 가냘픈 의지와 유리 같은 멘털을 걱정하며 ‘강한 남자’ 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내가 지금은 처가살이를 하고 있다. 가장 곤혹스러운 때 중 하나인 두 분이서 다투시던 때 중간에 끼여 있으면 굉장히 불편함을 유발한다. 언성은 높아지고 말리지는 못하겠고 집안에 갈 곳은 없고 분위기는 험학하고 어색해진다. 특히, 식탁에서 다투시면 밥이 쉽사리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부부싸움이란 게 한쪽이 자존심을 굽혀 줘야 한쪽으로 기울어 끝날 텐데 그날은 어느 한쪽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셨다. 정월 대보름이던 그날! 식탁엔 나물 반찬이 잔뜩 올라왔으며 장인어른의 반찬 투정으로 장모님이 예민해하는 음식에 대해서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것은 두 분의 싸우는 모습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불편함에서 약간은 유치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인어른은 식사를 거부하며 자리에 누웠고 장모님은 자신의 음식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해서 ‘맛없다’ , ‘안 먹는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계셨다.
“당신 진짜 밥 안 먹을 거야?”
“안 먹어~”
“내가 이 음식 한다고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을 다 한 것이 이거야?”
나중에 이런 다툼을 지켜보며 심각해 하기보단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두 분의 싸우는 순간을 담아 글로 써보자는 것이었다. 만약 사연이 나온다면 선물도 줄 것이고 “장인 장모님 그만 다투십시오.” , “계속 다투시면 계속 방송에 나오게 할 겁니다.” “허허허~”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계속 싸우는 순간을 보아왔기에 글은 술술 써졌다. 라디오에 사연 글을 보냈고 잊고 살다가 당첨을 확인하고 보니 한 주간 뽑힌 3개의 사연 중 하나에 선정되었고 최종 2등을 하게 되었다. 다투실 때마다 말리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어느 코너에 글을 올려볼까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나쁜 사위였다.
다시 사이가 좋아지셨을 때 말씀드렸더니 그냥 웃으실 뿐이었다.
<라디오 사연 글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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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께서
“이 사람이.... 나먹자고 그러나?”
“어흠.. 우리 안서방 먹으라고 그러지!”
“일이 힘드니깐 얼굴 반쪽이 돼버렸네.”
“이럴 땐 고기나 생선을 먹어줘야 힘이 난다고!”
딱히 할 말이 없으셨는지 조용히 밥 먹던 저를 끌어들이시는 장인어른의 한마디였습니다.
그러자 장모님께서 저를 쏘아보시며 물어보시네요.
“안서방!”
“자네도 고기 없으면 밥을 못 먹나?”
“하하 아뇨 장모님.”
“오늘 나물 반찬이랑 콩나물국이랑 특히 고사리나물도 간이 딱 맞는걸요.”
그러자 이번엔 장인어른이 절 쏘아보시며
“이것 봐.”
“이것 봐.”
“남자가 줏대가 있어야지.”
“장모님 고기 한번 구워주십시오!”
“이런 말도 못 하나?”
“장모님 고기 한번 구웁시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잖아!”
“남자가 할 말은 하고 살아야 남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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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물 베기라는 부부싸움하시는 처갓집에서 사위는 불편함을 승화시켜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롭게 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론 글로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지만 말이다. 사위의 글감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장인 장모님이 글감의 원천이었고 농촌생활 하나하나가 값진 에피소드가 되어주었다. 메모하기 바빠졌고 글 쓰는 시간이 부족해서 잠을 줄여가며 사연으로 쓰곤 했다. 엄청나게 많이 글로 쓰는 건 아니지만 하루하루 쓰다 보니 어느새 라디오 애청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긴 겨울밤을 보내며 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