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의 결별, 낯선 문턱을 넘어서
2025년 7월 14일
나의 작은 세상이었던 화장품 회사에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너무 오랜 시간 한곳에만 머물렀던 탓일까. 컨베이어 벨트 위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용기들처럼, 내 시간도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빨리, 빨리!" 관리자의 날카로운 외침은 이젠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고, 하루 종일 못 박힌 듯 서서 손만 까딱이는 노동의 끝에는 어김없이 퉁퉁 부어 터질 듯한 다리의 비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움직임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간절함으로 뒤적이던 당근 앱에서 '저온 단기알바'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고, 망설임 없는 지원 끝에 곧바로 다음 날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운 시작의 아침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이른 기상에 대한 강박 대신, 늦잠이라는 작은 사치를 누렸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이불 삼아 한참을 뒹굴거렸다. 몸을 일으킨 시간은 오전 11시.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3분 카레에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조촐하지만 든든한 한 끼를 채웠다. 분주함 대신 여유로움을 택한 아침은, 곧 다가올 치열한 오후를 위한 나만의 의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나의 전장이 될 저온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드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휴게실로 들어서자,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출퇴근 명부에 서명을 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자신을 대리라고 소개한 한 여성이 오늘 우리가 수행할 업무에 대해 간결히 설명했다. 푹푹 찌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두툼한 패딩을 걸쳐 입는 아이러니한 상황. 문이 열리고, 차가운 냉기가 훅 끼쳐오며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오늘의 내 임무는 택배 송장에 적힌 수량만큼 고기 제품을 아이스박스에 담고, 신선도를 유지해 줄 아이스팩을 채워 넣는 일. 설명만 들었을 때는 너무도 간단하고 쉬워 보였다. 속으로 '어머, 이건 정말 꿀 아르바이트잖아?'라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오늘은 편안하게 시간만 보내다 돌아가겠구나, 하는 달콤한 상상은 거대한 오산과 처참한 착각을 낳는 서막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자 나의 안일했던 예상은 산산조각 났다. 먼저, 제품을 담기 위해 산더미처럼 쌓인 아이스박스 더미를 내 작업 공간으로 옮겨와야 했다. 다음은, 냉동고 깊숙한 곳에서 팔레트 위에 적재된 육중한 고기 상자를 끌고 와야 했다. 이 두 가지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는 것부터가 상상 이상의 고역이었다.
아이스박스의 그 부피와 무게는 만만치 않았고, 꽁꽁 얼어붙은 고기 상자는 그야말로 돌덩이였다. 어림잡아 두 상자의 무게를 합치면 족히 40킬로그램은 넘을 터였다. 허리에 묵직한 압력이 가해지며 '윽'하는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자칫 균형을 잃으면 그대로 뒤로 나자빠질 수 있기에,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조심스럽게 들어 옮겨야만 했다.
8시간이라는 긴 노동의 시간 동안, 아이스박스와 고기 상자를 들었다,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은 무한히 반복되었다. 2~30분쯤 지났을까, 척추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고, 허리는 금방이라도 두 동강 날 것 같은 위태로운 통증을 호소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근력은 자연스레 길러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저온 창고의 한기는 장갑을 뚫고 들어와 손가락의 감각을 앗아갔고, 시리다 못해 저려오는 통증이 손끝을 휘감았다.
'차라리 그만둘까' 하는 나약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후회는 하지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밀도가 높을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후회한들 무엇이 달라지랴.
오후 다섯 시, 저녁 식사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메뉴는 소불고기와 시원한 무국, 바삭하게 튀겨낸 가자미였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밥은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고 맛있었다.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허겁지겁 배를 채우며 짧은 휴식을 만끽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무거운 짐과의 사투는 계속되었다. "시간아, 제발 빨리 흘러가다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로봇처럼 손을 놀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의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져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다음 날 내 통장에 새겨질 숫자를 떠올리며,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짰다. 쓰라린 고통, 저릿한 다리, 얼얼한 손끝. 그러나 이 모든 감각을 뚫고 '일하고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지탱했다. 오늘 하루,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허리는 아작이 난 듯 욱신거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문득,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남들은 학창 시절 치열하게 공부하고 노력해서 번듯한 사무실에 앉아 머리 쓰는 일을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소홀히 보낸 대가를 지금 이렇게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리라. 지난날에 대한 처연함, 배우지 못한 자의 묵묵한 한 같은 감정이 가슴 한구석을 저미게 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한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과거 나의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나는 그 선택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주어진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고된 하루는 나에게 돈뿐만 아니라 값진 교훈을 남겼다. 나약함의 껍질을 깨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단단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선했고, 관리자 역시 어떻게든 도우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 적어도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없었다는 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돈의 노예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는 내일도 기꺼이 이 고통을 감내할 것이다. 오늘 하루, 참으로 고되고 또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