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누군가는 정서 불안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애착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불안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부모와의 관계도 완전히 무너져 있지는 않았다.
다만 집 안의 공기는 늘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집보다 바깥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 와중에 여자 문제까지 없었던 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조바심 많은 성격, 그리고 과잉보호.
자기 삶이 불안했기에
아이들을 더 품에 안으려 했고,
그게 자식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이였던 나는
그 불안정함을 언어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지 않았고, 문제를 만들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습관 하나를 만들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조절하는 법이었다.
성인이 된 뒤, 우울증이 강하게 왔다.
병원을 찾았고, 상담을 했고,
체크리스트를 작성했고,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진단이 절대적인 진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도 스스로 회복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우울증은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들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전부도 아니다.
약을 먹지 않고도 나는 내 삶의 리듬을 다시 설계했고, 생각의 속도를 조절했고,
무너지지 않는 방법을 몸이 다시 배우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만은 남아 있다.
무언가에 깊이 집중하고 있을 때,
조금 자라 있던 손톱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불안해서가 아니다. 괴로워서도 아니다.
그건
몸의 사소한 신호를 체크할 여유가 없을 만큼
몰입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음악을 한다.
기타를 연주할 때
오른손 손톱은 소리의 윤곽을 만든다.
손톱이 없으면 소리는 뭉개지고,
감정은 흐릿해진다.
그래서 이 습관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표현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제 나는 안다.
이 습관은 우울의 잔재도 아니고
불안의 증거도 아니다.
어릴 때 혼란 속에서 질서를 만들던 몸의 기억이다.
그 기억을 이해한다.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손톱을 예쁘게 길러보고 싶다.
손톱과 살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더 아름다운 기타 선율을 만들어내고 싶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돌보고 싶다.
오래된 습관 하나를
천천히, 조금씩 내려놓으려 한다.
그게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