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여러 개다.
태어나기 전, 나를 기다리던 이름은 "이채정"이었다.
봄 햇살처럼 밝은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름은 세상에 단 하루도 머물지 못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언니가 그 이름을 가진 채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바꿔라.”
그리하여 나는 은정이 되었다.
은혜 은(恩), 단정할 정(姃).
작명가분은 내가 몸이 약한 사주라며
‘은정’이나 ‘영주’가 맞는 이름이라고 하셨고,
엄마는 그중에서도 70~80년대에 흔히 불리던
따뜻하고 정감 있는 이름, ‘은정’을 고르셨다.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디에서도 무난한 이름.
나는 거꾸로 태어났다고 한다.
몸이 약했고 잔병치레도 많아서
부모님의 애를 태우며 자라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실에는 ‘큰 은정’, ‘작은 은정’이 있었다.
심지어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은정 A, B, C’로 불릴 정도로 정말 흔한 이름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도,
가는 곳마다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이름이 나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노래를 시작하며
음반 발매를 앞둔 시점에
작곡가 선생님과 프로듀서님이 물으셨다.
“본명으로 할까요, 예명을 새로 만들 건가요?”
유명한 가수는 아니지만,
음원으로 세상에 내 목소리를 처음 내보내는 순간이었기에
설렘 속에서 나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겠다고 했다
석영(晳映) — 빛날 석, 비출 영.
나를 비추는 이름이었다.
스스로 무대의 조명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선택했다
나는 석영이 되어 노래했다.
‘석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금 더 나다워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수 석영, 석영가수님,
석영님' 이렇게 불려지는 게 점점
내 본명처럼 편안해졌다
내가 지은 이름으로 내가 작사하고,
어쿠스틱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나는 캘리그래퍼이기도 하다.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는 일에 따라
예명이나 호가 여러 개 있어도 좋아요.”
그리고 나에게 세 개의 예명을 지어주셨다.
소예(笑禮)— 소담스러울 소, 아름답고 고울 예
가율(歌律) — 노래할 가, 음률 율
서율(書律) — 글 쓸 서, 음률 율
재능이 여러 가지이니,
필요한 자리마다 그에 맞는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노래하고 글 쓰는 사람,
리듬과 문장을 동시에 가진 이름.
그 이름 안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꿈꾼다.
보통은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만
필요에 의해 혹은 자신이 하는 일과 연관 지어 예명으로 나를 표현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이름이라는 명칭 하나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마다 예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채정이 태어나지 못했던 자리에
이은정이 자랐고,
석영이 노래했고,
가율이 가사를 쓰고,
서율이 글을 쓴다.
내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이
나는 참 좋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