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정착한 지 올해로 12년째에 접어들어 간다. 이곳에서는 바다를 보고 싶을 때마다 동해와 남해를 자주 찾는다. 아무래도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해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포카리스웨트 광고가 생각나는 청량한 푸른 색조는 동해가 으뜸이지만, 물때에 따라 바닷길을 열고 닫는 서해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황금빛의 낙조가 더해진다면 그 아름다움과 감동은 배가 된다. 사는 동안 서해를 가 볼 기회가 없었다는 그를 태안으로 이끌고 간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곳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세렝게티의 광활한 초원과 한없이 건조한 이국의 사막이 떠오르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어떤 구조물이나 장애물이 없어 사방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마냥 걷기에는 좋지 않았지만, 이곳만큼 황량한 겨울을 잘 보여줄 곳은 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다. 바람에 의해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만들어진 모래 언덕. 대자연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 앞에서 인간이라는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다. 아득히 펼쳐진 이곳에 단둘만 있으니 어쩐지 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 행성에 뚝 떨어진 두 연인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우리의 날씨 운은 좋지 않았다. 도착한 날 내내 흐리고 바람도 많이 불며, 파고도 높아 해안 풍경을 즐기기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결국 아쉽게도 기대했던 황금빛 낙조는 볼 수 없었다. 낙조는 실패했지만 운이 좋게도 물때가 맞았다. 바닷길이 열린 꽃지 해변의 나란히 솟아 있는 두 바위섬까지 함께 걸었다. 바다 아래 숨겨졌던 길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도 아니었고, 넓고 고운 모래사장도 아니었다. 그 대신에 자그락자그락하고 굵고 거친 자갈돌들이 발끝에 스치며 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모든 것은 단편적인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테라스에서 맞이한 아침 풍경은 내가 원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로 보이는 바다의 민낯은 해를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밤사이 밀려왔다 그대로 얼어붙은 포말의 흔적이 겨울 바다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서해의 매력은 독특한 형태와 질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움과 채움의 미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채울 줄만 아는 나는 비울 줄도 아는 서해가 그저 부럽다.
다시 꽃지 해변으로 나갔을 때는 밀물이 들어와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썰물과는 또 다른 매력이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예쁜 조개껍데기도 주워 기념으로 집에 가져왔다. 이 날의 조개껍데기 중 하나는 이사하면서 깨져 버렸는데, 두 개는 아직도 남아 내 책장 위를 장식하고 있다. 꼭 사진뿐만 아니라, 이런 작은 물건 하나에도 그날의 기억이 남아 어느 날이고 나를 다시 그때로 데려간다. 그래서 뭐든 잘 버리지를 못하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쉬워서 해안가 드라이브를 즐겼다. 지나는 길에 발견한, 바다가 보이는 벤치와 녹지 않은 눈이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계절을 한가득 품에 안은 바닷가에서 보내는 시간은 행복했고, 나도 그 계절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꽤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까지 채워 가둬놓고는 채 버리지 못했던 묵은 미련을 겨우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물때가 맞았는지, 인연이라 부르는 무언가가 내게 또다시 밀려들어 온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지만 모든 것은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