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대한 엉망진창 생각정리.
춥다 추워. 겨울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견딜 수 있는 추위.. 일 것 같지 않다. 바람아 멈춰 주길 바라. 생각이 넘치는 필자. 추위를 타면 비관적인 생각이 넘쳐버린단 말이다.
옛날에는 추위는 추위일 뿐인 순간이 있었다. 추운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열정에 사로잡혀서 추워도 몸을 사리지 않았던 어린 날의 나의 패기. 지금은 그런 판타지 같은 이야기하지 말라며 어른들이 짓는 쓰디쓴 에잉쯧 표정을 하게 됐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부러워할 줄 알지? 아니. 부럽지 않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 추위에 떨며 열심히 하던 내가 안쓰럽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한 거니? 결국 이렇게 될 텐데. 그냥 따듯한 방에 들어가 귤이나 까먹으면서 만화책이나 보지 그랬어.
안다. 이렇게 비관적인 사람은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한다는 거. 주인공들은 항상 캔디 같아야 사랑받는다.
넘어져도 웃어야 한다. 추워도 열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하하 호호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다. 만약 비관적인 사람이 결말에 하하 호호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별점 0점. 안 봐도 비디오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것인가.. 추위가 날 이렇게 만든 건가. 아니면 내 본성이 원래 이런 무디고 재미없는 인간인 것인가. 오늘도 추운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마당을 쓸었다. ‘아 상쾌하다.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쓰니 개운하군.’이라는 생각..? 아니. 그건 희망 사항. ‘아우 추워. 이렇게 추운데 마당을 쓸라니.. 너무하다 너무해.’ 이런 비관적인 마음이 샘솟는다.
추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추우니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애인의 어깨에 입혀주는 커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현실에선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며 각자 빨리 뛰어 들어오는 커플이 있을 뿐. 가족영화에 나오는 추우니 아이에게 자신의 목도리를 매주는 부모님의 따듯한 사랑을 담은 장면. 현실은 “그러게 따듯하게 입으라고 할 때 입지, 왜 엄마 말을 안 듣냐”라며 혼나는 아이들의 모습. 현실의 우리는 추위에게 졌다. 우리는 추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사실은 나도 추위에 영향받지 않는 멋진 초인이 되고 싶다. 이 추위도 다 지나갈 추위라며 허허허 웃으며 추위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 비참하게 시린 이 추위를 느끼며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표정을 짓게 되는 건.. 아마도 추위는 사람의 본모습을 들춰 내주는 시험대일 수도 있다. 나의 본모습을 들켜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젊은 날의 열정이 아니다. 여유다. 여유가 필요하다. 추위 속에서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상쾌함을 느낄 줄 아는 그 여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추위를 타는구나. 집에 들어가서 따듯한 전기장판과 귤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추위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 포근한 것에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건 다 추위가 있기 때문이었지.
이렇게 훈훈하게 생각정리를 마무리해도 내일의 나는 춥다며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려고 노력은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풀어헤치고 꼬리에 꼬리를 물지 않았다면 난 비관적인 생각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부족한 것이 여유라는 정답을 얻었다. 역시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은.
“추위여,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