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문학관

정지용 문학관과 율곡 기념관

by 려원

구성

1) 정지용 문학관과 생가

2) 율곡기념관


1)【정지용 문학관과 생가】

겨울과 이른봄 사이에 방문한 곳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에서 1902년 5월 15일(음력)에 태어났다. 정지용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생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의 죽향초등학교)에 다녔으며, 14살 때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지용은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부터 문재를 나타내며 박팔양 등 8명과 동인을 만들어 동인지 <요람> 10여 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시에는 휘문고보의 주동자로서 무기정학을 받고 1,2학기 수업을 받지 못하였다.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교토와 옥천을 오가며 시를 쓰고 발표했다. 1929년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몬고 보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교사질을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 여자 대학교) 교수로 옮겨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1948년 이화여대를 사임하고 녹번히 초당(현재 은평구 녹번도)에서 머물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고에 수용된 뒤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2년 납북 후 금기시되어 있던 정지용 문학의 회복 운동이 시작되어, 1988년 3월 31일 정지용의 문학 해금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지용회가 결성되고, 1989년에는 지용문학사상이 제정되었다.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문학독본>등이 출간되었다.


자료:윤동주가 사랑한 시인 정지용 시집


처마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정지용의 본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들어섰으나,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시인 정지용이 일본에 유학 갈 때 고향을 그리며 쓴 시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하였다.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을 통하여 한 폭의 풍경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그의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이다.


정지용 문학관(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 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숲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향의 정경을 오롯하게 담아낸 정지용의 시 ‘향수'는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로 다시 태어나 더욱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정지용 연구서


이곳은 정지용 생가 옆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으로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며,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전시실과 영상실, 정지용 연구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정지용 문학관은 이 외 더 많은 자료들이 있으나 사진에는 담지 못했다.)


정지용 생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정지용. 얼굴」




2).【경기도 파주 율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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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1537~1584)

조선조 16세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1536년(중종 31)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하였다.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그의 현실적 철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624년(인조 2) 문성이산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모셔졌다.


울골기념관(내)






율곡문화제 학생들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