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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려원 Aug 15. 2023

그 밤의 문장을 건너서

내 부담을 주지 않고 남의 수고를 읽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기도 하지만 앞서 미안한 마음이 더 크게 차지할 때가 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한 시인님의 시집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배송 예정일이 지나도 오지 않기에 재차 확인하니 품절로 인해 배송이 안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을 알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책 몇 권 있으니 그것을 보내 주겠다고 주소를 달라고 하신다. 그 답에 계좌를 달라고 했다. 그도 아니라고 한다. 그냥 보내 준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나도 아니라고 했다. 그냥은 읽을 수 없으니 계좌를 달라고 했다. 그다음 돌아오는 상대의 답은 변함없었다. 계좌 추적의 밀고 당기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일단은 받고 난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주소를 보내 드렸다. 


어제 등기소포에 한 권이 아닌 그간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 책을 받고 미안한 마음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으니 다시 계좌를 달라고 말씀드렸다. 여전히 같은 답이 돌아왔다. 처음 내게 그냥 보내 주겠다고 하신 그 말씀에 책임을 다하시려는 마음이 나를 더 미안하게 했다. 


지인들이 책을 출간했을 때 주로 서점에서 직접 사서 읽거나 보내 준다고 하면 그 뒤 나의 답은 계좌를 달라고 한다. 한 권의 책에 들어 있는 문장 마디마디의 골절마다 염증을 앓아 내며 크게 아팠을 그 마음을 안다. 그만큼 작가의 수고와 땀이 얼마나 많이 배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몇 날을 거치고 몇 해를 거쳐서 나오는 그 문장들이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쓴 글을 잘 읽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충분하다고 한다. 이미 자신의 글에 수고비 한 푼도 보태지 않은 그 마음을 어떻게 잘 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미안함으로 건너온 그 밤의 문장들이 자판 위로 가득히 쏟아지는 아침이다.  


  

연기처럼 날린 가루

뿌연 안개 보이지 않는

너와 나의 거리 알 수 없다

혼탁한 소음 이명 울리는

밤의 적막을 거둬 새벽길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장막의 서곡

나의 둘레는 하얀 입김이 서려

볼 수 있어 볼 수 없는 곳

걸어도 끝이 없다

갈 길은 여기 이만큼

안개 걷힌 발자국

디딘 무게에 피어난 꽃이고 싶다

보이지 않는 뭉친 안개 퍼짐에

열매는 공부 중이다  디딘 발 전문(2016)/ 정상원. (시집 사호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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