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려원 Aug 31. 2023

덧칠하는 삶

분홍립스틱

그해 당신이, 해외여행을 다녀오시며 사 온 선물 꾸러미 안에는 분홍 립스틱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겨울날 받았던 립스틱에는 아직 오지 않은 봄날마저 차갑게 들어 있었습니다. 화장대 위에 제일 많이 쌓여 있는 게 립스틱이었는데 왜 이걸 사오 셨을까 그때는 당신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고단하던 내 심정을 당신은 누구보다도 더 나를 잘 알고 계셨겠지요. 


창백하던 얼굴에 립스틱이라도 바르고 화사해 지라는 말씀 이셨지만 그때는 차마 그 무엇 외에는 나를 덧 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해 아버님을 보내고 화장대 서랍을 열어 당신을 꺼내 보았습니다. 내 부족한 삶가운데 오셔서 늘 나를 덧칠해 주시던 어머니.  오늘은 아직 바래지 않은 당신의 그날을 꺼내 봅니다.  


이제 당신은 가고 나의 계절만 남아 있지만, 닳아 없어질까 봐 쓰지 못하고 넣어둔 서랍 안에는 그 해의 차가운 겨울 속에 당신 같이 따스한 봄이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제 삶의 부족한 날들을 늘 봄꽃으로 계셨는데 나는 어느 마음가에 앉아 누구의 연약함을 채우며 삶을 덧칠해 줄까요. 오늘도 저는 내 정갈하지 못한 마음 갈아 우물을 파며 맑은 세상을 보려 합니다. 뿌연 먼지 속에 가려진 세상을 거둬내고 마음밭을 일구며 그 속에서 새로운 나를 또 하나 지으려 합니다.



사진자료: 그해 겨울 서해안. 바다가 보이는 통나무집 펜션   

작가의 이전글 인연인가 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