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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쉬자 응? 난 할매야(1-6)

10, 할빠와 손녀의 첫번 째 여행 (2023, 7월 24~28 일본)

by 숨터

일본의 거리는 그늘을 만들어줄 만큼 무성한 나무들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사람의 체온을 넘기는 날씨에 땡볕을 쉬지 않고 걸어 다니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쓰러질 듯 비틀대면서도 사랑이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끝까지 어디든, 다른 성인 여행자들이 중도 탈락해도 마지막까지 가는 사람은 사랑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만 가고 싶은데 사랑이는 자신을 핑계로 삼을 빌미를 만들어주지를 않았다.

그런데 걸음수로만 따지면 사실 사랑이가 우리 두 배는 더 걸을 것이다. 다리 길이도 짧으니 보폭도 짧을 거고 어른들처럼 똑바로 얌전히 걷지 않고 주위를 돌아다니고, 비경제적인 체력 소모를 아끼는 어른들과 달리 더 많이 돌아다니니 말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볼 거다 보고 갈 거 다 간다. 의미도 모르면서....

참, 근성 하나는 갑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버스를 탈 때쯤엔 거의 기절 직전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버스를 타면 사랑이는 그대로 쓰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근성만이 아니라 회복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타면 사랑이는 시든 파초잎이 물을 먹은 듯 파릇파릇 되살아 났다. 그러니 노년의 할빠가 한창 움트는 아이의 체력을 맞추려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남보다 뒤처지는 걸 싫어하는 사랑이는 처음 버스를 탈 때 나를 굉장히 다그쳤다. 제일 앞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승부욕에 비해 수줍음도 많은 편이라 저 스스로 나서지는 못하고 나를 앞세우는 것이다. 거리 투어 중에도 사랑이는 제일 앞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가이드 꽁무니를 바싹 붙어 쫓아다니곤 했다. 내가 다른 것을 보느라 지체하면 가이드 뒤를 놓치게 될까 봐 혼자 애를 태우곤 했다.

조용하면서도 극성스러운 사랑이 덕에 나와 사랑이는 가이드 바로 뒷자리, 남편은 우리 뒷자리에 앉았다. 처음 그렇게 앉은 그 자리는 여행 내내 우리의 자리가 되었다. 투어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처음 버스를 타서 자리를 잡으면 그것이 그 여행 끝까지 그 사람의 자리라는 무언의 묵계가 정해진다.

버스를 타자마자 숨도 돌리기 전에 사랑이가 말했다

"할머니, 수수께끼 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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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한 차 타기 딱 좋은 5인이다. 아들, 며느리, 사랑이, 우리 내외.

차 한 대로 몇 시간을 같이 다니다 보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고 가족 간의 정도 더 돈독해지게 된다.(사랑이에게 동생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바랐는데 그랬다면 살 비비며 여행하기는 어려웠겠지?) 나는 사랑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끝말잇기를 가르쳐주었다. 폭발적으로 어휘력이 늘어나고 새로운 단어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던 시기였던 사랑이는 이 끝말잇기가 매우 재미있던 거 같았다.

그 후 우리는 사랑이의 요구로 차를 타기만 하면 식구들 모두 참여하여 사랑이 맞춤 끝말잇기를 했다. 처음에는 사랑이가 알 거 같은 단어만 골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의 단어 구사력은 놀랄 만큼 발전되어 있었다. 전문적 용어도 쓰기에 설마 알랴싶어 물어보니 그 뜻까지 정확하게 설명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 유치원 차에서도 선생님에게도 끝말잇기하자고 졸라 새로운 단어를 계속 묻고 배워나갔다고 했다.

여섯 살이던 작년에는 스무고개를 가르쳐주었다. 이건 끝말잇기보다 좀 더 복잡한 규칙과 추리력, 사고력, 청의력이 필요한 게임이 아닌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그 규칙을 이해하고 난 후부터 사랑이는 끝말잇기보다 더 재미있어했다. 그 후 우리는 차를 타기만 하면 출발부터 도착할 때까지, 사랑이가 깨어있는 한 스무고개의 지옥에 빠져야 했다.

이걸 처음 가르쳐 줄 때 알아듣기 쉽게 수수께끼라고 했더니 사랑이는 스무고개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이미 입에 밴 수수께끼로 말하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처음 가르쳐줄 때 아무리 어려운 단어라고 정확한 말로 가르쳐야 한다니까.




차를 타면 스무고개를 한다.

이 공식은 일본의 투어버스 안에서도 적용이 되었다. 사랑이가 문제를 내고 내가 맞추고 , 내가 문제 내고 사랑이가 맞추고. 일본에 온 만큼 문제는 거의 일본에서 사랑이가 본 것에 대한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의 난이도가 제법 높았다. 나도 어리다고 사정 봐주지 않는 편이다. 궁리궁리하여 최대한 어렵게 내는데 그래서 사랑이는 식구들 중에서 내가 문제 내는 걸 좋아했다. 어려워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우리는 서로의 귀에 대고 소곤댔는데 우리 앞자리의 가이드는 우리들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었던 거 같았다.

가이드가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보기 좋아요. 제게도 손주가 있는데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그리고 사랑이가 너무 얌전하다며 칭찬했다. 사랑이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끝말잇기나 스무고개는 긴 여행의 시간을 죽이면서도 재미있게 아이를 교육시키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이다. 아이 수준에 맞춰 적당하게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문제로 아이의 긴장감을 끌어당겼다 놨다 하면 아이는 집중을 한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다. 난 피곤하다.

아이는 지칠 줄을 모르는데 언제나 내가 먼저 두 손 든다.

사랑아 우리 조금만 쉬자 응? 난 할매야. 늙었다고.


20230726_145300.jpg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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