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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Aug 16. 2017

치유의 숲

강릉바우길8<국민의 숲길>

 더위를 먹은 것인지 일주일 정도 축 처져 있던 아내가 바우길을 걷자고 하니 반색을 한다. 몸은 그러하되 마음은 구름처럼 길 위에 두고 싶은 것이다. 가다가 못 가겠다고 주저앉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어쩌면 그늘이 드리운 숲길을 한가롭게 걷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이 대관령 국민의 숲길이니까.     


  대관령휴게소 맞은편 신재생에너지 전시관 앞에 주차를 하고 보니 캠핑카들이 여럿이다.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의 중년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반려견과 함께 느긋하게 쉬는 이들도 있다. TV 채널을 돌리다 캠핑카를 타고 집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한동안 마음을 뺏긴 적이 있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삶이란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족하면 그것이 곧 나의 삶인데 우리는 너무 제도화된 삶에 나를 맞추려 구차스럽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년엔가 쓸 만하지만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오래된 텐트를 버렸는데 여기 와서 보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차에 싣고 어디든 다니면서 휴가를 즐길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사는 쪽은 폭염인데 여긴 의외로 가을 날씨처럼 선선하다. 어제 영동지방에 폭우가 쏟아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해발고도가 높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길을 나선다. 예전에 걸었던 국민의 숲길 입구는 유치원 숲 체험장으로 변해서 길이 막혀 있단다. 다시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대관령 휴게소는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려나?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보면서 고속도로를 달려왔는데, 정말 좋은 날씨여서 사진 찍기 좋다고 쾌재를 불렀는데 이곳 날씨는 완전 딴판이다.     


  그러나 풀잎에 맺힌 빗방울을 털고 젖은 흙을 밟으며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오늘도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런 일쯤 하나 만날 것 같은 기분이다. 비 온 후의 산책, 서정이 듬뿍 담긴 그 문장만으로도 마음이 환하게 열린다. 길 위에 서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순간을 맞이하겠는가.     

  길이 잘 닦인 임도를 걸어 산림 트레킹 코스 입구에 이르니 전나무 숲이 펼쳐진다. 양묘장의 시험 묘목인지, 보호수인지 모르겠으나 나무마다 번호가 적힌 표찰을 달고 있다. 이름표와 달리 숫자만 적힌 표찰은 수인번호처럼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다. 나무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무를 매일 관찰하고 기록하는 누군가의 눈길과 손길. 나무들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호를 받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나무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쓸데없는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숲은 무성하고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온통 푸르다.     

  인적이 드문 길을 헤쳐 나갔더니 비로소 제대로 된 길이 나타났다. 국민의 숲길답게 숲 자체가 완성형이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길은 알맞게 젖어 푹신 거리고 알맞게 젖어 향기롭다. 그늘이 많아 더위를 식히기에 그만이다. 조림을 한 탓에 나무들이 군더더기 없는 글처럼 매끄럽다. 제주 사려니 숲길의 자갈 많은 길보다 걷기가 훨씬 용이하다. 그런 까닭인지 훈련을 하는 선수들과 종종 마주친다.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코스이다 보니 훈련하기에 적당할 것이다. 나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운동해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땀을 요구하는 훈련을 묵묵히 견디는 그들의 치열함에 압도되는 것이다. 내 삶은 한 번도 그러지 못했으므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하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절제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적당히 살아온 삶. 그것이 내가 걸어온 정도다. 나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지만 적당함에 안주하고 산 나 자신이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비 온 후의 산책과 딱 맞아떨어지는 버섯 무리를 만났다. 하얀 갓을 쓰고 올라오는 버섯 무리가 신비롭다. 마치 병 기운을 털고 일어선 아내 같다. 이제 살 것 같다고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모자를 쓰던 아내. 나이가 들어가는 까닭인지 최근엔 나보다 병치레를 더하는 것 같다. 먹는 약도 더 많다. 나는 종종 내 행복은 당신의 건강에 달려있다고 말하곤 한다. 당신이 해준 밥을 늙도록 편안하게 받아먹으며 살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참 이기적이다. 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짠하다가도 짜증 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국민의 숲길을 벗어나 제궁골 쪽으로 들어서려는데 빗발이 심상찮다. 도로 옆 정자에서 포도 몇 알로 쉼을 한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이 정도 비야 충분히 맞고도 걸을 수 있지. 중도에 비를 맞으며 걸었던 지리산 둘레길, 처음부터 아예 비옷에 우산까지 중무장하고 걸었던 제주 올레길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그땐 왜 그렇게 다녔을까. 무슨 생각으로 겁 없이 다녔을까. 가랑비에 길을 멈추고 돌아보는 지난날이 그저 즐거움으로 떠오른다.    

  

  사람들에겐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하며

  에너지를 재충전해주는 

  마음 한 자리가 있다

  그곳을 치유의 숲이라 부른다     


  비가 잦아들자 제궁골 쪽으로 접어든다. 펜션 공사가 한창이다.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전원단지의 주택들이 호사스럽다. 지금도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전원생활은 버킷리스트의 하나인데 쉽게 이루질 것 같지 않다. 직장 문제, 경제적인 문제, 체력적인 문제, 자신감의 문제 등등. 지금도 이런저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대안도 찾아보지만 그 꿈을 과연 이룰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축축이 젖은 숲은 한층 어둡다. 발자국이 없는 길에 발자국을 내며 걷는다. 습지에 속새가 가득하다. 속세를 떠난 것 같은 속새. 가느다란 대나무 같은 속새의 빈 대궁을 생각하며 비탈길을 오른다. 나는 이런 길을 걷는 걸 언제까지 반복해보고 싶지만 만만치 않을 거란 걸 안다. 감수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겠다는 꿈은 접었다. 물론 히말라야 트레킹 가겠다는 꿈도 그전에 접었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는다.     


  바우길 1구간인 선자령 가는 길 분기점에 이르러 길꾼들을 여럿 만난다. 양 떼 목장 울타리 너머로 양 떼는 안 보이고 산책하는 사람들만 보인다. 철쭉 피는 봄날에 만났던 양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언제나 인생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 그럼에도 우리는 즐겁고 슬프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야생화를 찍기 위해 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바닥에 닿을 만큼 낮춘 사람들을 본다. 무슨 일에 열정을 가진다는 거, 그만하면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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