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택의 기술 이은영 Sep 12. 2016

서른 넘은 여사원의 건배사

나이 듦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오늘은 본부 회식자리가 있는 날이다. 몇 주 전부터 절대 빠지지 말라는 알림이 팀 카톡방에 울려 퍼졌다.


이번 회식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다 참석하도록!
(특히 이은영 너 말이야 너)


분명 가로 안의 말은 없었다. 명백히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아주 생생히 팀장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카톡이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심어져 있는 듯 생생히 들렸다.

이은영 이번에도 빠지면 가만 안 둔다! 


마치 유령같이 좀처럼 내가 있음을 알리지 않는 팀 카톡방이지만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영혼은 잠시 멀리 떼어 놓은 채 대답한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려 심지어 느낌표도 세 개씩이나 붙였다.

네 팀장님, 이번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without soul tone and manner)


언제부터인가 회식자리에 가기가 싫어졌다. 하루 종일 보는 회사 사람들과 매일 점심을 같이 먹는 그들과 저녁까지 먹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회사 사람들끼리 이어지는 대화에 점 점 싫증이 났다. 회사 사람들과는 회사 이야기만 한다. 전문 용어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제발 공장 이야기 좀 그만하자


퇴근 후 회사 밖의 회사 사람들과는 그 어떤 주제로 시작했건 결국 이 두 가지 주제로 끝이 났다. 처음에는 점 점 따분했다. 생산적이지 못해 시간이 아까웠다가 나중에는 분노했다.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면서 이렇게 불평만 한다고 욕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상사 욕 (동료, 후배 욕 포함)
회사 욕




그래서 회사 사람들과는 철저히 회사 안에서만 만났다. 퇴근 후에는 무조건 회사를 벗어냈다. 철저히 나에게서 회사를 벗겨냈다. 그렇게 벗은 몸으로 온전히 나인채로 세상 밖에 나왔다. 처음에는 혼자였다. 외롭고 두려웠지만 회사를 덜어대니 이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작은 틈이 생겨났다.


모든 것에는 빈틈이 있어요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죠
There’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레너드 코헨


그리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비로소 나를 만날 수 있었다. 회사에 오래 있다 보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신을 지우고 살게 된다. 나는 없고 회사와 일만 남은 느낌이다. 그래서 상사를 욕하고 회사를 욕 한다. 그리고 나는 온갖 욕과 불평에 휘감겨 점 점 나를 지우고 결국 나는 사라지게 된다. 그저 충실한 한 명의 회사원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회사 욕을 멈춰야 한다. 


이러한 회식의 양상은 높은 사람이 있을 경우는 매우 달라진다. 매우 화기애애하며 팀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웃음꽃이 넘치는 자리로 변한다. 메뉴도 고급스럽고 마음껏 많이 먹어도 된다.


여사원 일어나 봐. 친절하신 부사장님이 여사원들에게만 특별히 택시비를 하사해 주신단다.


그런데 아뿔싸, 돈이 모자란다. 하는 수 없이 인원을 조금 줄여야만 했다.

서른 살 넘은 여사원은 앉아!


(ㅈ ㅈ ) 나는 앉아야 했다.

택시비를 못 받아 아쉬운 것이 아니다, 무언가 불편한 낄낄거림 속에 앉아야 하는 것이 여간 내키지 않는다. 결국 행사의 마지막은 서른 넘은 여사원의 건배사로 마무리가 된다. (택시비도 안 줘 놓고 건배사는 왜 시키냐! 건배사는 힘 있는 자의 폭력이다)


그래도 현실의 힘없는 자는 어쩔 수 있나.

시키는 대로 건배사를 하는 수밖에.



[서른 넘은 여사원의 건배사]


25살에 입사해 35살이 되었습니다.

젊음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곧 젊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듦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나이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곱게라고 외치면 여러분은 늙자라고 외치시면 됩니다


선창: 곱게

후창: 늙자!

(자고로 건배사의 핵심은 선창과 후창의 짧고 굵은 외침이다)

(짝짝짝짝)


팀장님도 상무님도 부사장님도 한 때는 다 젊은 신입사원이었으리라. 나도 신입 때는 회식 가는 게 싫지 않았었다. 선배들의 따뜻한 이야기 속에 그들의 경험치를 사며 선배들이 사 주는 맛있는 술과 밥을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회식이 마치 연장 근무처럼 느껴졌던 것은 회사 연차가 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인 것 같다. 건배사를 약 만 번쯤 한 후인 것 같다. 회식 자리의 난데없는 삼행시를 천 번쯤 지은 후로 기억된다.


팀장님도 상무님도 부사장님도 젊은 청년이었으리라. 신입이었으리라. 오늘 회식 최고 높은 사람 부사장님은 김수현과 동일한 얼굴 크기를 가진 꽃중년이셨다. 그는 본인 핸드폰에 여전히 청년시절의 자신을, 신입 시절의 자기를, 부장 시절의 사진을 여전히 보관해 가지고 다니셨다. 청년 부사장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는구나.

사람은 이렇게 나이 드는구나.


나이 드는 것은 아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냥 그렇게 늙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나이 들어 늙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리하지 않아 늙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듦의 아름다움이다

나의 나이 듦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오늘 회식자리에서 기울인 소주 한 잔에서 얻은 화두치곤 꽤 괜찮은 걸 건졌다. 사람들이 이래서 술을 마시나 보다.

술자리를 통해 인생을 보곤 하니까.




글에 공감했다면 [구독하기]를 클릭해 주세요. 왜냐하면 새 글이 올라오면 가장 먼저 읽어 볼 수 있으니까요.

글이 좋았다면 혼자 읽지 말고 페북이나 친구에게 [공유하기] 버튼을 눌러보세요. 왜냐하면 좋은 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큰 기쁨이니까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왜냐하면 반드시 답글을 달거든요.


페이스북 @glamjulie / 유튜브: 이은영의 글램 토크 / 블로그 http://blog.naver.com/dreamleader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