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선택해 드립니다, 이은영의 할까 말까 LAB
내 인생의 변화의 순간을 모두 뽑아 그중 가장 그 변화의 크기가 큰 것을 10개 고르고 거기에서 또 반을 줄인 후 남은 5가지 중 딱 3개만 남기면 아래 세 가지 상황으로 압축할 수 있다.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니다가 월급 받는 회사원이 된 것.
엄마의 딸에서 내 딸의 엄마가 된 것.
월급 받던 직장인에서 월급 주는 사장이 된 것.
1)학생에서 회사원으로
2)직장인에서 엄마로
3)회사 다니는 워킹맘에서 난 한 회사의 대표로 변신했다.
신입사원 명함을 들고 회사를 다닐 때와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는 나름의 적응기간이 주어졌었다. 신입이니까 OJT도 있고 봐주는 선배들도 많았다. 1년간은 틀려도 되고 질문도 마음껏 할 권리가 주어진다고 했다. 호랑이 상사도 신입이라며 가르쳐 주고 덜 혼내고 예뻐해줬다.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랬다. 처음 이 주는 조리원 이모님들이, 마사지샵 언니가, 그 후 한 달은 언니와 나를 키운 유경험자 친정 엄마가, 그다음부터는 지금까지도 자식을 셋이나 키운 시엄마가 줄곧 내 옆에 계셨다.
이미 내 길을 거의 흡사하게 먼저 겪었던 사람들이 늘 그렇게 옆에 있던 것이다.
하지만 ‘사장’은 다르다. 사장에게 On the Job Training 따위는 사치다. 아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사장인데 무슨 직무 OJT인가? 당연히 선배와 동료도 없고 신임 사장이라고 가르쳐 주거나 기다려주고 더더군다나 예뻐해 주는 사람은 전혀 없다. 자칫 틀리면 직원들 월급은 고갈되고 우리 회사 의사결정을 어디 물어볼 데가 없다. 철저히 스스로 최종 결정해야 한다. 내 결정에 의해 회사가 문을 열었고 내 결정 하나로 회사는 문을 닫을 수 있다.
처음이라고 적응할 시간 따위는 없다. 당장 내 월급은 고사하고 우리 멤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사무실 비용과 각 종 4대 보험(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업재해보험.) (난 사장이 되기 전까지 4대 보험의 정확한 종류를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회사가 알아서 다 처리하고 있었으니까.)을 비롯한 국세와 지방세라는 원천세와 부가가치세 또 법인세를 내야 했다.
회사원 일 때는 때 되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게 월급이었다.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나가면 나가나 보다.
그렇게 신경 안 쓰면 월급이 들어오는지 카드 값이 나가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던 게 월급날이다. 사장이 되고 가장 신경 곤두세우고 기억하는 날짜는 월급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월급은 제 날짜에 나가야 하며 그만큼 회사에 돈이 쌓여 있어야 한다. 법인 통장에 대표 개인 돈은 마구 무한대로 넣을 수 있으나
법인통장에서 대표가 함부로 돈을 뽑는 것은 범죄다.
들어갈 땐 마음대로 들어가도 나올 때는 마음대로 못 나간다.
나는 이 말을 법인통장을 보며 가장 절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변화들 중 단 하나만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코
월급 받던 사람에서 월급 주는 사람으로의 변화다.
11년 넘게 숨만 쉬어도(물론 안다. 절대 숨만 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간혹 정말 회사에서 숨만 쉬는데도 월급 잘 챙겨가는 사람이 있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을 내가 누군가에게 밀리지 않게 꼬박꼬박 준다는 것은 아이를 낳는 것 이상의 큰 변화였다. 뼈 마디마디가 벌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출산과 버금갈 만큼의 나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다.
사업이 힘든 이유는 그 사업이 힘들어 서가 아니다. 나를 바꾸는 과정이기에 힘든 것이다.
직장인 시절에는 그렇게 일의 중간 토막만 하는 게 싫었다. 그 일의 목적과 필요성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근사하고 비져너리 하게 쓰고 있지만 결국 상사가 시켜서 이다. 다만 상무님이 시켜서, 팀장님 공적 세워야 해서 라고 쓸 수 없기에 없는 이유도 가져다 붙이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그 토막을 하다 다른 부서에 넘기거나 딱 취할 공적 까지만 하고 흐지부지 된 채로 없어지거나 임원의 임기만료와 함께 끝나는 게 싫었다. 일의 중간만 말고 처음과 끝을 다하고 싶었다.
사장이 되고 보니 일의 처음과 중간, 끝까지 만들고 책임을 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주어진 오더의 수행이 아니라 사장은 일의 기회를 치열하게 만들어야 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이번 달 월급이 위태롭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정작 사장이 되고 나니 그 기회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매 순간 기회를 포착하고 살며시 온 기회를 가시화하는 것은 모두가 사장이 몫이다.
즉 회사가 망하거나 어려우면 모든 것을 사장이 책임져야 한다.
처음 시작에는 당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기꺼이 총무팀이, 숫자가 아무리 싫어도 기꺼이 회계팀이, 기획을 못해도 기획팀이, 법을 몰라도 법무팀이, 마케팅 경험이 없어도 마케팅팀이, 영어를 못해도 해외전략팀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운 좋게 회사가 잘 된다면?
Winner takes All.
결국 그 성공 또한 당신의 것이다.
그렇기에 미친 리스크를 혼자 감당해내야 한다.
회사원 시절 퇴근하면 마치 스위치가 있는 것처럼 나는 업무 관련 모든 생각을 꺼 버릴 수 있었다. 나름 잠도 편히 잤다. 회사 생각이 나면 의도적으로 지웠다. 회사에 도착하면 그제야 업무 가동 모드 스위치를 올렸다. 퇴근해서까지 업무를 하면 뭔가 억울했기 때문이다. 회사원 이은영이 아니라 온전한 나로 사는 시간의 짬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사업을 시작한 후 내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I’m Always ON!
나는 항상 회사 생각을 한다. 항상 일을 생각하고 회사의 확장성, 미래, 직원들에게 전해야 할 비전과 우리 회사의 WHY를 놓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각성한다. 순환고리처럼 WHY, WHAT, HOW, HOW WHY WHAT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회사원일 때 간혹 오전 시간을 헐렁하게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면 뭔지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간만의 여유였다.
아 오늘은 몸과 정신이 좀 편하다.
상사 없으니 좋다.
그래 좀 이리 살자.
내 사업을 시작하니 출근 후 오전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버리고 밥때가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 밥 먹어도 되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밥 생각이 싹 사라졌다.
넌 굶어야 해.
아주 여유가 넘친다.
뜨거운 맛을 봐야겠구먼!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밥만 충 내는 쓸모없는 존재감.
이것이 남의 일과 내 일의 소름 끼치는 차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문득문득 그런다. 나 사장해도 되는 사람인가?
적자와 서자도 아닌데 끊임없이 내 역할에 대한 정당성에 물음표를 던진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매출 50억대 7년 차 회사 사장님도 마찬가지 질문을 한다는 점이었다.
“ 나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인가?”
이것이 사장의 숙명이라고 했다. 모든 사장이 그 질문을 던진다고. 그 갭을 메꾸며 그냥 꾸역꾸역 하는 거라고. 준비된 시작이란 없다.
Before Alice got to wonderland she had to fal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원더랜드로 가기 전 깊은 굴 속으로 떨어졌다.
준비된 시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칫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나. 이유가 아닌 가장 편한 변명을 대고 있는 나. 그런데 정말 준비가 다 된 후의 시작이란 것이 있을까? 그 준비는 얼마큼 돼야 다 끝나는 것인가?
준비된 시작은 없다
준비된 믿음만 있을 뿐.
준비가 되어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되어 내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믿고 있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사장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