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선택해 드립니다, 이은영의 할까 말까 LAB
어느 1,2,3차 고과권자가 모두 없는 햇살이 참 따뜻한 오후였다. 상사 없는 아름다운 날, 직장인 어린이날을 맞아 우리 팀 막내 민경이와 회사 밖 쿤스트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분명 이 곳은 회사 앞인데 이곳만 오면 가로수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다. 상사들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파스타와 리조또를 먹고 언제나 햇빛이 부족한 직장인 광합성을 할 겸 자몽 에이드를 테이크 아웃해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분명 빠듯했던 점심시간이 상사가 없으니 참 긴 것은 절대적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란 생각이 든다.
햇살처럼 예쁜 막내 민경이가(당시 본사 3대 미인) 머릿결을 반짝이며(젊은 애들은 머릿결도 참 좋다. 어려서 그런가?) 물었다.
“선배님은 왜 아직 회사에 다니세요? 선배님은 충분히 안 다니셔도 될 것 같은데…”
내 이름으로 된 몇 권의 책과 강의, 특유의 자신감, 안정적 경제활동 중인 남편. 아마도 막내 눈에는 내가 회사 이름이 아닌 내 이름 살면 더 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회사 밖에 나가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처음 받아본 질문이었다. 나도 궁금했다. 회사를 떠나야 함을 누구보다 가깝게 인지하고 있었으나 언제 떠나야 할지, 왜 떠나야 할지 묻지 못했다. 질문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지부진했다. 그리고 아마 그토록 확실히 보이는 그 불안정성이 불안했을 것이다.
사람은 질문을 받으면 자동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다. 당황해서 몇 초 망설였지만 나는 이런 대답을 했었다.
“응, 아직 이 회사에 해 주고 싶은 일이 있어. 그거 해 주고 나가려고.”
우린 분명 동성 지간이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사랑이 보였다. 퇴사하지 않는 이유와 또 회사의 시기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한 말이었으나 뭔지 모르게 근사했다. 회사 간판 떼고 내 이름으로 하는 일이 한두 가지 쌓여 가면서 난 회사를 떠나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은 모두가 그렇듯 일치되지 않는다.
큰 회사 이름이 아니라 작은 내 개인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입사 2년 차 때의 일 때문이다. 현장을 모르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 정책에 따라 공채 신입사원들은 처음 1~2년을 현장으로 배치받았다.
학교를 갓 졸업한 여대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장갑이란 것을 껴 보았다. 친구들은 입사 선물로 팀에서 준비한 명함 지갑, 만년필을 받는다 던데 나는 손바닥 면이 시뻘건 목장갑과 카터 칼, 수첩, 모나미 볼펜을 받았다.
매장 영업 관리자였기에 팀장님부터 개인 pc가 존재했고 난 내 자리도 당연히 책상도 더 당연하게 언감생심 컴퓨터는 더더욱 없었다. 남들은 1년, 3년, 5년 차 때 퇴사 위기가 온다는데 입사동기 단톡 방의 분위기는 대략 이랬다.
“1초, 3초, 5초마다 퇴사 위기가 온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그 다음날 저녁 7시에 퇴근하는 일이 종종 반복되었다. 매장은 연중무휴에 폐점은 12시였다. 매주 행사가 바뀌고 본점이라 기라성 같은 바이어들과 사장단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오며 지적 폭탄을 떨어뜨려 매장을 수시로 바꿔야 했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역술관을 두 번이나 찾았다. 내 질문은 한결같았다.
“저기… 저 이직할 수 있을까요?”
이직을 하려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야지 왜 역술관을 찾아갔을까? 동기들은 말했다. 새로운 직업 찾을 정도의 체력이 남아 있지 않는다고. 그래서 못 그만둔다고 말이다. 다른 직업을 찾을 정도의 활력은 부족했으나당장 답답하니 심리적 안정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2년이 지나니 본사로 발령이 났다. 본사라고 얼마나 좋겠냐 만은 내 책상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내 개인 컴퓨터도 있었다. 때 뭍은 유니폼과 목장갑이 아니라 스커트에 구두를 신고 출근할 수가 있었다.나는 너무 좋은 나머지 주말에도 출근해 내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신입이라 딱히 일도 없었기에 정말 그냥 책상을 느끼며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또라이 한 명 들어왔다는 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사무실에 내 개인의 책상과 컴퓨터가 있다는 사실이 난 그렇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층 쓰레기통 앞에 책상 하나가 놓인 것이다.
왜 여기에 책상이 있지? 누구 책상이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책상의 주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부장님의 책상이었다. 심지어 그 책상에는 컴퓨터도 없었다. 부장님의 일은 하루 종일 오직 독서광처럼 책만 읽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를 하지도 밥을 먹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회사의 정해진 점심시간을 어기는 법도 없이
그는 항상 혼자 밥을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이상했지만 차마 이게 무슨 일이에요?라고 묻지 못했다.
그렇게 그분은 6개월쯤 더 버티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셨다.
물론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권고사직 후 수용하지 않은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읽은 겪은 27살의 나는 그 후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내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습관이다. 그렇게 가만히 운 좋게 들어온 대기업의 도도한 명함을 보며 회사 로고를 지워봤다. 당연히 회사 이름도 없어진다. 회사 주소도, 내 부서 이름도, 직책도, 사무실 번호도 사라진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지우고 나면 한 가지 남는 게 있다. 무엇인지 눈치챘는가?
그것은 바로 ‘내 이름’이다. 이. 은. 영. 만 남았다.
어렴풋이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나는 생각했다.
“회사 이름 말고 내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해!”
회사가 나 싫다고 나가라고 하면 버티고 싶지 않았다. 식구 때문에, 아직도 한참 갚아야 하는 대출금 때문에, 아이 때문에, 병원비 때문에, 학자금 때문에 그 어떤 이유가 있어도 월급에 더해 내게 주는 굴욕을 결코 겪고 싶지 않았다. 돈 앞에 나약 해지기 싫었다. '내가 너한테 청춘을 다 바쳤는데 어떻게 나한테 네가 이러니', '나 이제 너 없음 안돼'와 같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길 바랬다.
그저 너 이제 나 필요 없어? 그럼 안녕. 하고 훌훌 털고 마침 잘되었다는 듯 나가고 싶었다. 불안함 없이, 배신감 없이. 모멸감 없이. 그저 서로가 더 좋기 위해 헤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 4년 뒤 내 이름의 책이 나왔다. 그 책에 일부러 회사 이름을 넣지 않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은영이 아니라 그저 작가 이은영으로 프로필을 작성했다. 그것이 회사 간판 떼고 내 이름으로 처음 한 일이다.
그 첫 책은 대박을 냈고 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우뚝 섰다. 최고의 작가가 탄생했다며 언론은 연일 보도 기사를 냈다.
…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설마 믿었다면 당신은 정말 때 묻지 않은 착한 사람이다. 사과한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당신도 나도 알듯이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지 않은가)
그 책은 있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물론 아직까지도 살아있지만 거의 반투명 상태이다.)
두 번째 책이 나온 것은 첫 책이 나온 2년 반 뒤였다. 아이를 낳고 3개월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책을 썼다.
둘째를 낳지 않는 한 이렇게 회사를 쉬는 기간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의 워크홀릭적 기질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래서 쉬는 기간 동안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싶었고 그것이 집필이었다. 신생아를 키우며 책을 썼고 사람들은 몸도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글을 썼냐며 극찬을 하거나 독한 년 취급을 했다.
그리고 또 2년 뒤 나는 퇴사를 했다. 사실 나는 좀 유별나게 회사를 사랑했다. 돈 버니까 다니지 무슨 사랑이냐고 하겠지만 솔직하게 나는 그랬었다. 회사 건물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회사 로고를 단 차가 지나가면 웃으며 그 차를 반겼고 지방에 내려가 우연히 회사 지점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차로 다리를 건널 때 보이는 회사 건물을 보며 너무 신나 하는 나에게 선배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은영아, 너는 회사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좋아해. 혹시나 그 환상이 깨지면 바로 그만두게 될 거야. 그런데 말야, 그 환상은 반드시 깨진다.”
몇 년 뒤 그 환상이 깨졌다. 더 이상 회사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11년 다닌 회사를 2주 만에 그만뒀다. 다행히 해 주고 싶은 일을 마친 뒤였다. 퇴직원을 처음 쓰며 10년 넘게 다닌 회사 그만두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지 몰랐었다. 마치 복잡한 이혼사유를 축약해 성격차이라고 쓰듯이 퇴사 사유란에 누구나 다 끄덕일 만한 육아(정작 상관도 없는 육아)를 써냈다. 퇴사가 처음이라 11년 회사 그만두기가 이렇게 간단 한지 몰랐다.
그리고 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똑같이 일을 했다. 11년을 일했으니 어디 외국 여행이라도 다녀올 법 한 기간에 회사를 차리고 빠르게 첫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계약 후 선수금으로 대기업 과장이었던 내 연봉만큼의 돈이 법인 통장으로 입금됐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퇴사할까, 말까로 고민하는 참 많은 선배 후배 동료 친구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이 퇴사 후 가장 힘들어하는 지점은 바로 ‘넘치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규칙 없이 정해진 일 없이 그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을 제일 어려워했다.
자기 시간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출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도 제 때 일어나 일 할 수 있는가? 상사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 만들 수 있는가? 회사 간판 다 떼고 내 이름으로 명함을 만들 수 있는가? 개인으로 프로젝트 수주를 할 수 있는가? 몇 달 안에 회사에서 받던 월급만큼 돈을 벌 수 있나? 회사 사람 빼고 진지하게 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나? 나를 따르고 내 뜻에 함께 해 줄 사람들이 있나? 내 몸 하나 건사하기가 힘든데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직원 월급까지 책임질 수 있나?
당연히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퇴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것이 받쳐주지 않으면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불안의 가장 큰 적이 돈이기 때문이다. 퇴사는 나를 돌아보고 객관적으로 나를 점검해 볼 좋은 측정 지표가 된다.
무턱대고 퇴사할 만큼 나 계속 업데이트되는 사람인가? 회사 간판 떼도 내 이름 하나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인가? 정해진 규칙 없이도 스스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를 믿고 함께 일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가?
이 질문 앞에 YES라면 퇴사해도 좋다. 당신은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사람이니까.
망설여진다면 퇴사를 조금만 더 미루자.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남다르게 하며 조금 더 당신을 업그레이드한 후에 퇴사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