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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Nov 29. 2023

집 밖으로 한 걸음만 더.

- 라라 소소 6

신발 끈을 조여 묶고 집을 나섰다.


하나뿐인 운동화는 거의 신지 않아서 새거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스니커즈나 굽 낮은 신발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운동화를 꺼낼 일은 없었다. 운동화에는 화려한 형광 주황색의 줄이 양옆에 그어져 있다. 두껍게 한 줄. 그 줄이 마음에 들어서 신어 보니 조금 컸다. 한 사이즈 작은 걸 신어 보니 너무 딱 맞았다. 양말을 두껍게 신거나 끈을 조여서 신으면 되니까 조금 큰 운동화를 샀고, 그 운동화는 신발장에 얌전히 놓인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일부러 방치한 건 아니지만 걸으려는 의지도 지니려 하지 않았고 운동화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형광 주황색 라인이 굵게 그어져 있는 운동화가 마음에 들었고, 집에는 운동화가 한 켤레도 없으므로 언젠가 많이 걸을 일이 생기거나 가벼운 등산이라도 가게 된다면 신으면 될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이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아니 기회는 있었지만 스스로 기회라 여기지 않고 기회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지도 않았다. 날이 좋으면 좋아서 등산을 가지 않았고 추우면 춥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걷는 것 또한 많이 하지 않았다. 오래 걷는 일은 피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아픔이 번지면서 고관절과 슬관절에서는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심해진다며 나 자신을 타이르고 적당한 걸음만 걸었다. 길게 걷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의 얘기였고 나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건강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금처럼 조금 아프고 조금 덜 건강해도 참을 수 있고, 그런 통증이 나의 하루를 지탱하게 해 주는 힘인 것 같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해오던 고민거리였지만 이번에는 괜스레 더 크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날이 선선해지면서 그나마 쥐고 있던 돈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을 먹고살기에 지금의 수입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다른 일을 구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없고 의지 또한 생기지 않는다. 머릿속만 복잡할 뿐이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화를 마구잡이로 보기도 하고, 집중도 되지 않는 책을 계속 읽으며 활자에 집착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자지 않아도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


책을 사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생활비를 줄이는 가장 보통의 방법은 먹지 않는 거다. 식비는 혼자 사는 사람에게 굉장한 큰 지출이다. 음식값은 비쌌고 음식을 만들어 먹기에 식자재는 너무 양이 많았다. 적은 양을 사려면 그 또한 비싸서 차라리 사 먹는 게 저렴해져 버리고 만다. 그러면 사 먹어야 하는데 사 먹으면 돈이 많이 들고 매일 편의점 삼각김밥만 먹을 수도 없다. 삼각김밥 한 개가 가장 저렴한 한 끼 식사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라면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김밥은 다양하고 나름의 영양가도 골고루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입맛이 없어 그마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돈이 문제다.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또다시 복잡한 생각 속으로 의식이 돌아가고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은 지 오래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 어쩌면 잘리고 - 나서 생활비를 최대한으로 아끼는 두 번째 방법은 나를 위한 지출을 줄이는 거였다. 책, 옷, 화장품, 나를 위한 지출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한 달을 지나고 보면 카드값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지출을 분석했고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줄였다. 그래야 가지고 있는 돈으로 버틸 수 있었다. 쥐고 있는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능하면 오래 버티고 싶었다. 다시 회사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 아무리 적어도 직장이라는 공간에는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존재하는 이들과 교류를 해야 하며 한 마디라도 섞지 않으면 그 집단에 속할 수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 버텨 날 재간이 없었다. 어려움. 이렇게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성실하지는 않더라도 해야 할 건 하는 사람. 최소한 약속이라고 말했으면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도서관에는 반납일이 정해져 있다. 동네 도서관은 한 달에 10권을 빌릴 수 있고, 2주간 읽을 수 있다. 도서 반납을 한번 연장하면 1주일이 늘어서 3주간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은 숨기 좋은 공간이다.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않아도 그들에 대해 알 수 있고 나의 마음을 특별히 전하지 않아도 그들은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게 교류고 공감이고 어딘가에 속하는 게 아닐까. 변명과 핑계는 그들이 잔뜩 만들어 주었다.


10권의 책을 한 번에 빌리고 한 번에 반납하는 건 너무 무겁고 고된 일이다. 두 권씩 빌려서 읽고 두 권씩 반납하며 새로운 두 권을 빌린다. 반납일이 아니어도 책을 다 읽지 않았어도 새로운 책을 두 권 빌린다. 그렇게 책이 쌓여가고 반납일도 비슷하게 하루 이틀로 다가온다. 책을 반납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한 권이다. 평일에는 저녁 10시까지 도서관 문을 열어서 해가 떨어지고 나서 여유 있게 천천히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집 밖을 나갈 수가 있다. 하지만 주말에는 5시에 문을 닫는다. 5시는 밝은 시간이다. 밝은 시간에 외출을 하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이 없는 새벽에 갈 수도 있겠지만 새벽에는 도서관 문을 열지 않는다. 기계로 반납할 수도 있는데 사람에 대한 믿음만큼 기계에 대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 믿음이란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가고 싶지 않아서 시계만 바라본다. 일분 이분 삼분 오분 십오 분 이십오 분.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간다. 모든 건 천천히 흐르지만 지나고 보면 너무나도 후다닥 급하다. 시간, 너 나한테만 그러는 거니?


4시 59분. 도착했다. 헉헉대며 책을 반납한다. 도서관은 언덕 위에 있어서 천천히 걸어도 약간은 숨이 찬데, 열심히 뛰다시피 걸었으니 헉헉댈 수밖에. 게다가 마스크도 단단히 쓰고 있었으니 숨이 찰만하다. 퇴근 준비를 하던 사서는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본다. 뭐 빌릴 책이라도 있냐고 묻는 표정이다. 없어요, 갈게요, 속으로 말한다. 다음에는 이렇게 바투 오지 않을게요, 저를 기억하지는 말아요. 이 사서는 자신의 퇴근이 칼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주말은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일지도 모른다.


빌린 책이 없으니 손이 심심해졌다. 햇볕은 오랜만인데 차마 마주할 생각을 하지는 못하고 터덜터덜 도서관을 나섰다. 대출 반납 업무만 5시까지이고 다른 공간은 7시까지 운영해서인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날 집에 와서 운동화를 꺼냈다. 한쪽 구석에 무심히 쌓여있던 상자들 속에서 운동화를 찾았다. 다음날 운동화를 신고 도서관에 갔다. 약간은 헉헉거리는 숨을 내쉬면서. 마스크 안에는 땀방울이 조금 맺혔다. 운동화가 발에 조금 커서인지, 오랜만에 이틀을 이어 걸어서인지, 갑자기 발목에 무리가 갔던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발목이 약한데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지,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다음 날에는 발이 운동화 안에서 덜그럭거리지 않도록 끈을 꽉 조여 맸다. 답답한 발로 도서관에 갔다. 헉헉. 두 권의 책을 반납하고 두 권의 책을 빌리고 빌린 책을 소독용 기계에 집어넣는다. 우웅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아가고 책은 소독약이 흩뿌려질 바람을 타고 한 장 한 장 팔랑 인다. 1분. 서가 한쪽에 있는 커다란 책상 한쪽 구석에서 책을 읽는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 글씨 쓰는 소리, 사람의 숨소리, 발소리가 들린다.


귀는 소리에 민감하다. 사르락 거리는 소리에도 귀는 반응하고 심장은 쿵쿵거린다. 소주잔이 밥상에 턱, 하고 놓이는 소리.


집에 와서 갤럭시 버즈를 찾았다. 어느 구석에 있었는데 방은 작아도 속속들이 숨어있을 곳은 많은가 보다. 몇 년 전에 핸드폰을 바꾸면서 딸려 왔다. 남들은 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쓸 때 나는 필요하다면 줄로 연결된 이어폰을 썼다. 줄이 달랑거리는 이어폰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설마 나를 보는 걸까. 그리고 이어폰은 별로 쓸 일도 없었다. 귀가 예민하니까, 어떤 소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잔잔한 음악조차도. 자연의 바람 소리라면 모를까. 운동화의 끈을 조였고 헉헉대며 도서관에 도착했고 책을 반납했고 책을 빌렸으며 책소독 기계에 넣고 돌렸다. 1분. 책상에 앉아서 귀에 갤럭시 버즈를 꼽았다. 종이 넘기는 소리, 움직이는 소리, 사락거리는 소리, 순식간에 모든 소리는 멀어지면서 희미해진다. 심장 소리가 그 희미함을 감싸 안아 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는 살아있다는 증거인가.


도서관에서 나와 집과는 반대쪽으로 언덕을 넘어갔다. 언덕을 넘어 건너편으로 가니 빽빽한 주택들 사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없고 한적해서 싸늘하기까지 한 공원이 있었다. 공원이라고 부르기에 미끄럼틀과 시소가 눈에 먼저 보여 놀이터 같은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지만 공원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이곳에 와서 생생하게 열기를 내뿜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올 수도 있고 노인이 머무를 수도 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나면 욕을 하고 침을 아무 곳에나 찍찍 뱉는 불량해 보이는 사람들의 아지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무 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작은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본다. 맨 위에 올라가도 무섭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미끄럼틀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높이 올라와 있는 것같이 당당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약간은 두려웠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엄마를 그리는 곳이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는 세상 모두를 감싸 안아주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아무에게도 소리치지 않고 내리누르지 않으며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존재만으로도 따스해지고 편안하고 포근해지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게 합당하다면 세상 사람들은 엄마를 손가락질하고 무시하고 자기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하려고 들겠지만 이 또한 품어 안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미소 짓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고관절, 슬관절, 족관절이라는 명칭은 서서히 알게 되었다.


커브를 꺾는 차는 그 길을 건너고 있는 나를 보지 못했고 커브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쫓겨 급하게 운전하던 차는 나를 치고 지나갔다. 내 앞뒤로 길을 건너던 사람들은 내가 붕 떠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상은 크게 없었다. 나는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었고 사실 병원이라는 장소가 무섭기도 했다. 온몸이 아프고 눈물이 났지만 기댈 누군가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입원은 하지 않았고 통원 치료를 고집했다. 그 운전자는 스멀스멀 웃으며 찢어진 청바지는 좋은 걸로 사주겠다고 말했다. 받지도 않았겠지만 결국 오래된 내 청바지는 계속 찢어진 채로 나와 함께했다. 초기에는 고관절을 중심으로 치료를 받았다. 점점 통증이 슬관절로 내려갔고 조금 더 지나서는 족관절에까지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고관절, 슬관절, 족관절. 남들과 다르다는 걸 티 내고 싶지 않아서 걸음걸이를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나면 밤에는 여지없이 통증이 밀려왔고 며칠 동안은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 건 아닌가 싶다.


다르다는 건 틀린 거와는 차이가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다르면 틀린 거라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한다. 남들과 다르게 느껴지고 싶지 않았고 틀리고 싶지도 않았다. 같아질 수 없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생각은 과거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고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한기는 내가 현재에 있음을 알려준다.


걸으면 다리의 통증은 여전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 헉헉대며 들렀다가 사람들 틈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복잡한 생각의 거리는 차단하는 것. 이런 하루가 나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당분간이라도 지속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걷기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고관절, 슬관절, 족관절이 번갈아 가면서 혹은 전체적으로 골고루 아프니 그건 잘 모르겠고 그냥 한번 걸어보는 거다. 형광 주황색 줄이 양옆에 그어있는 운동화도 아직 너무나 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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