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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Dec 20. 2023

경찰서, 다신 안 갈 거야!

- 라라 소소 9

경찰서라고 하면 학교 교무실처럼 넓은 공간에 책상들이 늘어서 있고, 한쪽 구석에는 철창이 있는 그런 장소가 떠오른다. 오가는 사람들로 복작복작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하며 경찰들의 단호한 목소리로 잠시 조용해지기도 하는 곳이 경찰서의 이미지이다. 영화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경찰서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다녀온 곳은 그와는 달랐다. 커다란 경찰서 건물 1층은 일반 회사처럼 넓은 로비와 소파 등 휴식의 공간이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3층에는 문이 닫혀있는 방들이 여럿 있었다. 크지 않게 붙어 있는 표지판들로만 이 방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하지만 황량하고 쓸쓸한 오피스 빌딩 같다고 해야 할까.


강력 3팀이라고 쓰여 있는 작은 사무실이 나의 최종 목적지인가 보다. 비밀번호던가 지문이었던가, 아무튼 보안장치를 풀고 들어가면 양쪽으로 책상이 3개씩 6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특이하게 입구 쪽에 동그란 책상도 하나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내가 그곳을 사용했을 때 그제야 그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사실 연락을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고, 그로 인해 온몸이 긴장하고 있어서 어떤 것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방문 시간 약속을 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이렇게 방문 전화가 걸려 올 거라고 예상을 못 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름만 알고 호칭을 몰라서 어떻게 불러야 할지 먼저 정중하게 물어봐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선생님이라는 내 직업 때문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통화에 비해서 훨씬 부드럽고도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윽박지르지도 않았고 협박조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지지 말자며 기합까지 팍 주고 전화를 걸었는데 나도 기가 좀 꺾여 더 친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원래의 나처럼.


처음 전화하셨을 때 다짜고짜 다그치며 진범인 듯 몰아쳐서 당황해서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보통 그렇게 하면 죄송하다고 자백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다고 상대도 대답한다. 결백한 사람한테 뭐 그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지만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다. 전화를 끊고 차분히 생각해 보고 찾아봤는데 그날이 수능이었고 원래 내리는 정거장보다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려서 다급한 마음에 택시까지 탔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난다고 설명을 드렸다. 그러면서 다시 질문과 대답으로 상황 정리를 하며 한동안 통화를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서에 와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기록에 남다니 또다시 억울해졌다.


다른 날로 더 늦추고 싶지도 않았고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기에 늦은 시간이라도 경찰서에 방문하기로 했다. 가면서 계속 생각을 했다. 펜을 주운 것도 아니고 묵주를 흘린 것도 아니면 왜 한참 동안 몸을 아래로 구부리고 있었을까.


저녁 8시 반. 경찰서 입구 민원 대기실. 체온을 재고 방문자 기록을 하고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잠시 뒤 나타난 형사님은 경력이 많아 보이고 나이도 어느 정도 있는 늘 보아오던 딱 영상 속 형사의 모습이었다. 편안한 마음도 편안한 곳도 아니었지만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피해자도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 분실 폰에 카드가 있었는데 카드는 그날 바로 다른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있든 없든 절차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기록은 해야 된다고 말을 건넸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사돈의 팔촌이라도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아야 된다는 걸 이번에 조금 실감하고야 말았다. 대한민국의 현실인지, 인간이 존재하는 어디든 발생하는 일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자기가 00 경찰서의 형사라고 하며 훔쳐간 폰을 내놓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전화에 무섭기도 했지만 보이스피싱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떠오른 사람이, 지난달에 결혼한 선배의 신랑. 선배가 청첩장을 주면서 남자친구가 경찰인데 너네 동네 00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었다. 형부는 그 이름을 가진 형사가 그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지금 이 사건이 조사 중인 건지 알아봐 주었다. 슬프게도 다 맞았다. 보이스 피싱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정말로 나에게 일어났다. 형부는 그 형사가 아는 직원도 아니고 이건 다른 부서 관할 사건이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아무래도 서에 방문해야 될 것 같다는 얘기도 해 주었다. 그래서 그나마 그 형사님의 목소리와 태도가 달라진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긴장이 약간 풀려서 나는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버스에서 몸을 구부렸을 때 양말을 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짧은 양말을 신으면 발목 아래로 자주 내려가서 버스 내리기 전에 올려 신은 것 같다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밖에는 없다. 좀 웃기다. 양말이라니.


영화 속 조사받는 장면처럼 컴퓨터 앞에는 형사가, 컴퓨터 건너편 의자에는 내가 앉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몇몇 책상에는 가림판이 있었지만 형사님 책상에는 없었다. 6명이 한 팀이고 3명씩 밤 근무를 하나보다. 신분증을 건네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혹시 나를 범인으로 몰고 갈까 봐 –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에는 정말 진지했고 무서워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 녹음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 녹음은 안 되고, 경찰 동의 하에 녹음을 할 수는 있는데 녹음실로 이동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녹음은 안 하기로 했다. 참고인 권리 안내서와 함께 메모장을 주어서 그곳에 열심히 공부하듯이 메모했다.



이름. 주민번호. 주소.


형사 : 분실 핸드폰을 가져갔냐고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출석 요망받은 거 맞으시나요?

라라 : 네 맞습니다.

형사 : 분실 핸드폰을 습득한 적이 있나요?

라라 : 아니요. 습득한 적 없습니다. 어떤 핸드폰이든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형사 : 12월 3일, 17시, A단지 정거장에서 버스를 타서 B초교 정거장에서 내린 사실이 있습니까?

라라 : 네 있습니다.

형사 : 그날이 기억나나요? 

라라 : 네 기억납니다. 그날이 수능이어서 기억이 잘 납니다. 수능을 보는 학생들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수능 관련 기사를 읽다가 원래 내려야 하는 정거장을 지나쳐서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생생합니다.

형사 : 버스에서 몸을 구부린 사실이 기억나나요?

라라 : 사실 몸을 구부린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CCTV 확인. 자세로 보아서 양말을 올린 것이 맞았다. 정확히 그 자세였다.      


형사 : 피해자가 내리고 나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본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버스에서 다급하게 내려서 마트 쪽으로 가는 영상이 찍혀 있습니다. 그곳이 핸드폰이 추적된 최종 장소입니다. 피의자 본인과 동선이 일치합니다. 신용 카드도 그 근처에서 발견이 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버스에서 몸을 구부리는 영상이 있는데 무엇을 했습니까?

라라 : 양말을 올렸습니다. (이 대답을 하는데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실소를 터트릴 뻔.)

형사 : 지금 어떤 양말을 신고 있나요?

라라 : (이 질문은 왜 하는 걸까?) 오늘은 추워서 목이 긴 양말을 신고 있습니다.     


형사가 그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사 : 피의자가 가져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피의자도 선생님이세요. 핸드폰이 꺼진 최종 장소와 시간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17시 20분쯤 C단지 D유치원 앞이라고요? 정확하지 않습니까? 통신사에 연락을 하면 정확한 정보를 문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요청하세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개의 다른 CCTV 장면을 보여주면서 아는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사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려고 지나갔던 그 길, 카드가 발견되었다는 그 길에 있던 사람들인가 보다.      


형사 : 이 자전거를 봤습니까?

라라 : 아니요, 시간이 늦어서 거의 뛰다시피 해서 지나갔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못 봤습니다.

형사 : 버스에서 본인의 행동이 의심할 만한 동작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라 : (정말 욱했다. 앞에서는 차분히 대답했는데 억울함이 튀어 올라와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니요, 의심할 만한 동작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물건을 주우려고 한 동작이라면 고개를 숙였을 것이고, 무언가를 주웠다면 어디에 넣는 동작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동작이 아니지 않나요? (나는 흥분하여 말이 점점 빨라졌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형사 : 전에 이런 일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나요?

라라 : 아니요. 경찰서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로 조사를 받아도 기록이 남는다. 다음에 또 억울한 일이 생기면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이고, 억울한 일은 너에게만 생기냐며 의심을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별일을 다 경험한다. 앞으로는 어디 무서워서 양말을 내 맘대로 올릴 수나 있을까. CCTV에 잘 찍히지 않는 버스의 구석 자리에 앉으면 불안해지지 않을까.


형사 : 버스의 그 자리에 피의자 본인밖에 없었고, 동선도 일치하는데 의심할 만하지 않나요?

라라 : (완전 흥분. 폭발 일 초 전) 지금 통화 내용 들어보니 어디에서 폰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저와 동선이 일치한다고요? 버스에서 흘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마지막 추정 시간도 저와 다른 것 같은데 의심을 한다고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면 버스회사에 연락을 먼저 해서 조치를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전혀 의심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형사는 키보드를 타닥타닥 거리며 정리를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났다. 나는 떨려오는 몸과 억울함을 다스리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형사님 책상 위의 달력은 10월이었다. 벽에는 경찰의 권리 헌장 같은 게 쓰여 있었고, 한쪽 구석의 책상 위에는 수사 관련 두꺼운 책들이 있었다.      


형사 : 읽어보시고 본인이 진술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모르는 용어들이 나온다. 그 용어들을 하나씩 물어봤고, 내용상 이상한 것들을 고쳤다. 다시 프린트를 하고 일어났다. 이제 마무리를 하려고 하나 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이곳에 쓰면 된다고 했다. 억울하고 어이없다고 썼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나서 C단지 D유치원의 위치를 검색했다. 나와는 반대의 동선이었다. 그 지도를 보여주며 동선이 다르다고 얘기했다. 그건 내일 다시 정확히 조사를 할 거라고 한다. 아까 찾아봐서 이 내용을 서류에 적었어야 하는데 못하게 되어 아쉽고 또다시 억울해졌다.     


입구에 있던 그 동그란 책상은 빨간색 인주를 엄지손가락에 묻혀서 지장을 찍을 때 쓰는 곳이었다. 내 이름이 쓰여 있는 곳마다 지장을 찍었고, 페이지마다 반씩 접어서 또 지장을 찍었다. 빨간색 인주가 내 엄지손가락에 스며들어 있다.


별말 없이 형사를 따라나섰다. 다른 어두운 방에서 복사한 신분증을 돌려받았다. 들어왔던 대로 3층과 1층에서 비밀번호인지 지문인지 아무튼 보안장치를 몇 개 통과해서 다시 민원실로 돌아갔다.     


형사 :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이라 태워드려야 하는데 근무 중이어서 태워드릴 수가 없네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라라 : 이제 끝인가요? 진짜 끝인 거죠?

형사 : 네 그렇습니다. 

라라 : 안녕히 계세요.     


민원실에 있던 경찰들에게까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끝났지만 뭔가 아직은 찝찝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의심해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업무를 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형사들이 그런 말투와 행동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도 많을 것이고, 억울함을 가장한 속임수도 많을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고 잘못과 올바름을 판단하며 틀린 것을 맞게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큰소리 앞에서 깨갱하고 작은 소리 앞에서 오히려 더 뻔뻔해지는 사람도 많이 봤다. 정의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에 잠기는 날들이다.


사과를 요구하지 못한 나 자신이 조금 한심했지만 그래봤자 뭐 하겠냐며 또다시 편한 쪽으로 타협하고 포기를 해 버렸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이럴 때는 정크 푸드를 마음껏 먹어야 한다. 지난주에 사놓은 과자와 컵라면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상황에 미소라니. 긴장이 조금 풀렸나 보다. 집에 먹을 게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집으로 가는 길, 걸을 때마다 양말이 자꾸 흘러내려간다. 이놈의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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