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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Jan 10. 2024

밴쿠버에서 평범한 하루하루

- 라라 소소 12 : 시애틀에서의 새해 2

밴쿠버는 캐나다이고 시애틀은 미국이다.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육로로 국경이 접해 있다. 자동차로, 버스로, 걸어서도 나라 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중고등학생 시절, 한국사보다는 세계사를 더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던 나지만, 나라 간의 통로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초중고 모두 강북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학생들 대부분은 부모가 둘 다 일을 하는 엇비슷한 수준의 가정에서 살았다.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여름에 며칠 계곡이나 바다로 휴가를 가는 정도로 방학을 보내는 그런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휴가는 고사하고 각자의 삶만으로도 바쁜 생활을 하는 가정에 속한 친구들도 여럿 되었다. 고등학교는 사립이라 조금 다른 애들이 있기는 했다. 누구누구는 아빠가 변호사라더라, 엄마가 의사라더라, 새로 생긴 아파트 넓은 평수에 산다더라, 방학마다 해외여행도 다닌다더라, 개인 과외를 몇 개씩 한다더라, 학교 이사장이랑 친척이라더라, 교장의 손녀라더라 등등의 소문은 많았는데 그런 애들은 보통 전교에서 손가락 순위권 안에 들어있었고 반에서 회장이나 임원을 하는 애들이어서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를 무시하고 교실에 없는 듯 조용히 공부만 하든지.


가장 친한 친구가 같은 학교에 배정받아서인지, 머리가 조금 커서인지, 고등학교에서는 친구를 사귀느라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게 된 것 같다. 성적도 성격도 집안도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서 친구가 되었고 혼자 다니는 애들이 있어도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뒤에서 수군거리지는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다 보니 선생님들은 입학하자마자 대학 얘기를 끊임없이 했고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대학 입시라는 그 어마무시한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제니는 순이의 고등학교 친구다. 물론 나도 그 학교에 다니고 졸업했다. 나와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지만, 순이와는 2학년, 3학년 모두 같은 반이기도 했고 크지 않은 학교라서 복도에서 오가다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나누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는 순이도 나도 각자의 삶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제로 떨어져 있었던 물리적인 거리도 멀었고 내가 느끼는, 나만 느끼거나 어쩌면 내가 만들어 낸 순이와 나의 정신적인 거리감도 있어서 만나면 다른 친구의 소식까지 전달받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가끔 만나면 순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여전히, 내가 느끼기에, 세세하게 빠짐없이 했지만 나는 전보다 말수가 줄었다. 할 말이 별로 생각나지 않았고 순이와 다른 나를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사춘기가 이제야 찾아오는 건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한국과 캐나다는 거리가 멀었다.


직항으로 가도 10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는데, 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경유로 끊었더니 밴쿠버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하루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환승지는 중국 상하이. 상하이 푸동 국제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은 7시간. 환승을 하기 위해서는 비행기에 들고 탄 짐을 다 가지고 내려서, 환승로를 통과해 밴쿠버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탑승구 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순이는 비행기를 타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환승을 해본 적은 없었다. 우리 둘 다 어리바리한 상태로 이렇게 가는 게 맞는지 불안해했다. 출발하기 전에 찾아본 바에 의하면 환승할 때 환승지에서 짐을 찾고 부치는 과정을 다시 한번 더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우리가 탄 비행기는 수화물 전체를 이동시켜 주어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안 그랬으면 우리는 밴쿠버에 도착하기도 전에 국제 미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몸만 가거나 짐만 가는 상황이 발생했을지도.


푸동 공항에서 크게 한 일은 없었지만,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면서 상점들을 구경하고, 쌀국수 같은 걸 사 먹고, 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비행기도 구경하고, 사람도 구경하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있는 순이의 말을 주의해서 듣거나 흘려듣기도 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불안한 마음에 환승 시간이 영영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 마음 편안하게 기내식도 먹고, 간식 박스도 받아서 과자를 우물거리고, 옆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와인과 맥주도 한잔씩 마시면서 12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밴쿠버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졸졸 따라 나갔다. 입국 수속을 밟으며 - 어디서 머무니?, 며칠 동안 있을 거니?, 친구집이요, 2주 있을 거예요, 웰컴투 캐나다, 도장 쾅쾅, 인조이 유어 트립!! - 긴장했는데 다행히 친절한 직원을 만났다. 수화물을 찾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게이트를 걸어 나간다.



수많은 외국인들 사이에 까만 머리의 제니가 보인다. 세상에서 제일 반짝여 보이는 사람이 제니였다. 우리 셋은 부둥켜 얼싸안고 반갑다고 잘 왔다고 고생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밴쿠버 시내로 나왔다. 시내는 약간 시끌벅적했다. 공항에서처럼 영어가 들리고 딱 봐도 외국인이라는 게 티가 나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식당이나 펍 같은 가게도 많았고, 쇼핑몰처럼 보이는 큰 건물도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짐이 있어서, 제니네 집으로 가서 짐을 먼저 풀기로 했다. 시내에서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는 배차 시간이 긴 것 같았다. 제니가 산다는 건물은 우리나라로 치면 낯은 층의 긴 복도식 아파트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아파트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단층으로 방이 주룩 나열되어 있던, 모텔이라고 쓰여 있던 숙소 건물이 몇 층 위로 겹쳐 만들어진 건물로 보였다.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디귿 자 복도는 각 변이 모두 굉장히 길었다. 집과 집 사이는 전혀 방음이 되지 않는 플레이트 벽으로 구획되어 보였다. 별거 아니지만 가끔은 내가 건축과 학생인 게, 건축을 공부한 게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지나친 사람들은 까만 눈과 까만 머리를 가진 외국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노인들이었다. 서울에서 약간 벗어난 시골 같았고, 주변은 한산했다. 이상하게도 한국과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 일들이 약간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 우선 거실이 비워져 있지 않았다. 거실에서 지내는 한국인 친구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남자친구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고 얘기했었다. 거실이 비니까 같이 집을 사용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가 거실에서 머물기로 했었다. 거실이 조금 더 넓으니까 순이와 내가 거실에서 지내든지, 낯선 곳이고 사람들이 다니는 거실이 불편하면 제니의 방에서 우리 둘이 지내고 제니가 거실에서 지내든지 하자고 얘기를 미리 해 놨던 것이다. 어디든 우리가 머물 공간이 생겨서 제니가 덜 불편할 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거실에서 떡하니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물론 집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 거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그 친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친구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크리스마스는 밴쿠버에서 보내고 연말에 가게 되었다며 상황 설명을 해 주어서 그제야 알게 되었다. 제니는 왜 미리 얘기를 해 주지 않은 걸까. 우리는 제니 방에 짐을 풀어야 했다. 제니는 집에서 제일 큰 방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순이와 내 짐가방까지 포함해서 셋이 방에 들어서니 아무리 크다는 방이어도 꽉 찰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지내기에는 방이 넓어 보이기는 했다.


제니는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에 학교에 갔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했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프로젝트 진행도 해야 한다고 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집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으라고 얘기하고 나갔다. 일찍 들어오겠다면서. 오랜 비행에 지쳐 더 자고 싶었던 순이와 나는 순이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반나절을 보냈고, 얼굴도 보지 못했던 다른 방 친구들 – 친구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낯선 이들이라 친구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사람들이라고 부르기에도 뭔가 미안했다. 님들이라고 해야 할까. - 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쑥덕거리며 제니의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고민만 했다. 나는 책을 읽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순이는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둘째 날도 첫째 날처럼 집에서 오믈렛을 만들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리가 제니에게 주기 위해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햇반과 통조림 반찬들은 나중을 위해서 선반 안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셋째 날에는 제니가 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자신은 강의도 듣고 프로젝트도 준비해야 하지만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캠퍼스 구경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한국과 크게 다를 거 없는 대학이겠지만 은근히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1시에는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학교 용품들을 파는 샵에 같이 가서 학교 이름이 새겨진 학용품이나 옷 등을 구경했다. 대학별로 그런 물품들이 많다고 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습에 왠지 모를 부러움이 일었다. 시간이 되어 매점과 도서관,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간 등을 알려주고 제니는 떠났다. 순이는 영어 시험에서 점수가 좋았고 회화도 나쁘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 원어민들과의 대화는 실전이었다. 역시 한국식 영어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지필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누구보다도 잘 통했을 것이다.


다운 타운에 몇 번 나가고 제니 학교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일주일이 지나갔다.


나는 동네 주민처럼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산책했다. 12월이라 주택들은 아름답게 성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가 지면 온 동네가 반짝였고, 아니다, 제니가 사는 아파트를 제외한 조금 떨어져 있는 주거 단지들이 모두 반짝였고, 산타할아버지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정작 동네에서 아이들을 많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버스 정거장이 있던 그 반대쪽에 있는 학교로 보이는 건물 근처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 학교 근처에는 놀이터도 있었고, 체육관도 있었다. 공간은 넓었고 열려 있었다. 감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여서 나는 슬그머니 학교에 들어가서 이곳저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수업이 끝났는지 아니면 쉬는 시간인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외국인이라고 이상하게 쳐다 보기보다는, 헬로,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서 나도 긴장을 조금 풀고 다음 날에 다시 그 학교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에 나는 범위를 조금씩 확장하며 동네를 탐방했고, 공원이나 작은 도서관 같은 평화로운 곳이 골목골목에 있는 걸 발견하고 혼자서 기뻐하고 흐뭇해했다.


순이는 집을 함께 쓰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제니가 없는 시간에는 그들과 함께 쇼핑을 가기도 하고 카페에 가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 서로의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주일이 지나가며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와 페이스톡을 할 때마다 엄마는 오늘은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색다른 걸 먹었는지, 재미있는지를 빠짐없이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나는 말을 얼버무리며 시차가 난다는 이유로 빨리 끊곤 했는데 그건 별로 할 말이 없어서였다. 비싼 돈을 들여서 – 내 첫 학기 등록금과 뼈 빠지게 아르바이트 한 비용을 탈탈 털어서 – 온 여행인데 너무 현지인 모드로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괜히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은 자꾸 그쪽으로 흘렀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현지인 모드를 즐기며 천천히 골목을 걷고, 풍경을 즐기고,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흡수되고 있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이곳이 캐나다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한국의 다른 지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 졸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많은 관광 명소나 꼭 가봐야 한다는 유명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니까, 하지만 이곳은 캐나다이고, 나는 거금을 들여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왔다. 친구 집의 방문이 목적이지만 그 목적 안에는 밴쿠버를 둘러보고 알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제니는 밴쿠버에는 볼 게 없다고 했다. 조금 유명한 데를 가려면 차가 있어야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편한데, 자기는 아직 차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도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근교에 있는 큰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순이와 나는 나머지 일주일 동안에 어디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둘이 돌아다니기에는 여행 경험이 너무 없었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돈이 조금 들더라도 현지에서 관광 스폿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 주는 가이드 투어를 인터넷에서 찾아 하루씩 가보기로 했다.


제니와 같은 집을 사용하는 친구들은 순이와 친해져서 우리에게 밴쿠버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들을 알려 주었고, 관광지는 아니지만 현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도 안내해 주고 같이 가 주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어떤 투어가 좋은지 잘 알 수가 없어서 선택에 고민하고 있을 때에는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좋은 자료를 찾아서 알려주기도 했다. 순이의 사교성 덕분에 나도 덩달아 덕을 보았다. 그 친구들 중에 거실에서 지내는 한국인 친구가 순이를 많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가 바뀐 일정보다 일찍 데리러 올 거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며, 남자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파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할 건데 우리도 함께 하자며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시애틀에 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라니! 시애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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