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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Jan 03. 2024

캐나다로 여행을?

- 라라 소소 11 : 시애틀에서의 새해 1

시애틀의 새해는 달랐다.

 

화려한 불꽃이 온 하늘에 퍼졌고 꽃 모양, 새 모양 등 다양한 불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볼을 비비며 “Happy New Year”을 속삭였다.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손에 와인이나 샴페인 잔을 들고 새해를 축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도 이들 틈에서 따뜻한 클램차우더 수프로 손을 녹이며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자!!”라고 말했다. 나는 동화될 수 없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껏 이방인임을 즐기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대학에서 건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건축과에 입학하는 건 아주아주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일찌감치 준비해서 수시 원서를 넣었어야 하는 건데 계획을 잘못 세웠다. 담임은 자신의 판단 미스를 어떻게 해서든지 회복하려고 일단 인서울을 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1. 다른 과로 입학한다고 해도 복수전공, 전과, 혹은 편입이라는 다양한 방법으로 건축을 전공할 수 있다.

2. 처음부터 건축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해야 건축도 잘할 수 있다.

3. 생각보다 건축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건축과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4. 인서울과 아님의 차이가 얼마나 큰 줄 아느냐. 지금은 모르더라도 후회할 날이 오고야 만다.     


라고,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설득하더니 나중에는 급기야 나의 미래를 걸고 협박성 발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안다, 나도 안다. 인서울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건축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싼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고서 또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쥐어짜 내야 한다고? 그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 첫 학기 입학만 겨우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로서는 최대한 돈이 적게 드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싶었다.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거나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나의 고집이나 아집 같은 게 더 크기도 했다. 또 서울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건축과에 입학하면서 1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것도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역시 어렸다. 다 큰 줄 알았지만 19세는 경험이 부족하고 미래에 대해서 조금의 희망이라도 갖기를 원하는, 나는 다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10대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담임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한 나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학교에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담임에게 연락을 한 적도 없다.


아빠는 입학금만 주려고 했지만 – 장학금에는 입학금이 포함되지 않고 등록금만 포함되어 있었다. - 엄마는 첫 학기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 금액까지는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엄마 사랑해. 대학 입학에 들어가는 목돈의 부담을 줄이고자 내가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모으고 계셨다고 했고 그 적금이 만기가 되었으니 그 돈을 주면 된다는 게 엄마의 의견이었다. 아빠는 이제 막 대학을 들어가는 애가 뭔 경제관념이 있겠냐고 하시며 그 돈을 그렇게 한꺼번에 줄 바에야 예치를 시켜서 나중에 돈이 필요할 때 그 통장을 주는 게 더 낫다고 지지 않고 반박하셨다. 물론 나 없는 곳에서 두 분이 끊임없이 언쟁을 하셨던 모양이다. 이 얘기는 나중에 엄마한테 들었다. 경제관념도 돈이 있어야 생긴다는 게 엄마의 주장. 돈이 있어야 어떻게 쓰고 저축하는 지를 알 수 있으니 딱 등록금 금액만큼만 주자고 했지만 아빠는 목돈을 내 손에 쥐어줄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리셨고 결국에는 두 분이 타협안으로 200만 원짜리 통장을 내게 주기로 하셨다. 한 달에 10만 원의 용돈을 받던 내게 입학금이니 등록금이니 하며 오가는 백 단위의 금액은 예상이 되지 않는 뜬구름 같은 돈이었다. 부모님의 전쟁은 부모님의 몫이었고 그랬거나 어쨌거나 상관없이 나는 친구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마트에서 친구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인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이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캐셔가 되었다. 캐셔는 마트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상품을 계산하는 업무를 한다. 동네 마트였지만 작은 슈퍼는 아니었고 계산대가 서너 개는 있었던 걸 보면 어느 정도는 규모가 있는 마트였다. 이과와 계산대 업무는 관련이 없었다. 바코드를 잘 찍으면 됐고, 금액을 잘 입력하면 됐다. 돈을 잘 받아서 거스름돈까지 잘 건네주면 되었다. 카드도 잘 찍고 포인트까지 잘 적립해 주면 되었다. 문제는 ‘잘’이라는 단어에 있다. ‘잘’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렵던지. 나는 손이 빠르지도 않았고 자꾸만 잘 못 눌러서 처음부터 다시 하기 일쑤였다. 최대의 난관은 결산이었다. 교대근무여서 아침 출근이나 마감 출근이 있었는데도 출근 시간과 상관없이 내가 일한 시간 동안 첫 금액에서부터 마지막 금액까지 수입과 지출을 포함해서 마감하며 남은 금액이 일치해야 했다. 몇 번을 세고 세고 또 세어도 돈은 늘 비었고, 맞지 않았다. 제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돈은 맞지 않는 건지. 억울하고 우울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큰 금액이 비는 날은 없었었지만 조금씩 소소히 비는 금액은 내 돈으로 막아야 했고, 나의 아르바이트 비용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친구는 마트 안에서 진열 일을 해서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고 한 달이 지나면 딱 일한 만큼의 금액을 받았다. 남의 돈을 만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그렇게 세 달을 꼬박 일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편의점이나 다른 카페 아르바이트보다는 시급이 높아서 어느 정도는 초기 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시는 캐셔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첫 알바 미션 클리어!


학교에서는 운이 좋게도 학과 조교를 할 수 있었다. 마트 일에 비하면 몸은 훨씬 덜 고됐고 학교 안, 학과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거다 보니 이동 시간이나 차비가 따로 들지 않아서 좋았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신입생 조교에게는 선배 조교들의 뒤처리와 교수님들의 잡심부름이 주를 이루었지만 첫 알바에서 몸과 마음이 단련되어서인지 이 정도쯤은 버틸 수 있었다. 근무 시간도 길지 않았고 수업도 다 들을 수 있었고 저녁에는 종종 주어지는 일이 없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동기들도 선배들도 슬슬 해외여행이나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만 건축을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해외로 유학을 가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어학연수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왠지 그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남자들은 군 입대 전후로, 여자들은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3학년이 되기 전 1학년과 2학년 여름방학에 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이었고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배낭여행을 해야지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성숙한다는 그런 믿음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과 공부와 병행하려면 돈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고 말이 배낭여행이지 여자로서 아무것도 없이 배낭만 지고 여행을 떠나는 건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배낭여행이더라도 돈이 든다는 말이다. 이렇게 뒤숭숭한 마음을 갖고 있던 여름방학 어느 날, 오랜만에 순이를 만나고 있었는데 순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도 얼굴은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 갑자기 순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고 방학이라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캐나다에 가니, 입학 시기도 맞지 않았고 어학도 부족하여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3 과정을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졸업하면 9월에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와 연결된 대학으로 바로 입학을 한다고도 했다. 새로운 세상의 사람을 만났다. 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그렇게 유학하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는 낯설었지만 나의 호기심을 자아 내기에 충분했다. 그 친구는 성격이 좋았다. 그래서 외국에서의 생활도 적응을 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은 홈스테이를 하고 있어서 손님을 초대하기가 불편하지만 나중에 대학에 가면 놀러 오라는 피상적인 말도 해 주었다. 그 말을 나는 종종 떠올렸다.


공부하고 조교 일을 하고 비슷한 생활을 하며 일 년의 시간이 지났다. 건축은 공학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예술의 일부였다. 설계는 디자인이었고, 구조와 역학은 공학이었다. 대학 수학을 공부했지만 디테일한 설계에 관심이 더 많이 생겼다. 공부를 하고 또 해도 해야 할 공부는 더 많아졌다. 직접 구상을 하고 설계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눈에 띄게 재능이 있는 동기나 선배도 있었고 그냥 수강만 하는 동기들도 많았다. 나는 재능은 없었지만 노력을 하는 편이었고 선배들을 도와 작업 시다를 하며 조금씩 견문을 넓혔다.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더 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해외로 나갔던 2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 순이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나도 끼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는 그 친구를 또다시 만났다. 작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그녀는 더 여유로워 보였다. 유학하고 있는 대학생 티가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였다. 한국 이름은 이제니, 영어 이름은 제니리. 그 사이에 대학생이 된 된 제니는 첫해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고 2학년이 시작되는 9월부터는 친구들 몇몇과 따로 집을 구해서 나와 살 거라고 했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아파트인데 방세가 너무 비싸서 거실도 방으로 치고 4명이 생활할 거라고 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그런 생활을 하는구나. 왠지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는 쉴 틈 없이 뼈 빠지게 일하고 공부하며 여행은 생각지도 못하는데, 부유한 부모 덕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거겠지, 하는 심통 부리는 마음도 솟아났다. 그런데 불쑥, 이제는 내 방이 생기니까 순이랑 같이 꼭 놀러 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친한 친구도 아니고 어쩌다 작년에도 올해도 순이 친구들 무리에 껴서 만나게 된 한 명에 불과한데 손까지 잡으면서 말해주다니.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이도 순식간에 우리 꼭 가자, 언제 갈까?, 하며 부추겼다. 순이의 마음은 진심일까. 내가 해외에 갈 수 있을까. 가도 괜찮은 걸까. 에이 모르겠다. 가자! 언제 또 가보겠어.


이게 내 첫 해외여행의 시발점이다. 제니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저렴하다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았다. 여름은 성수기라 여름보다는 겨울이 조금 더 저렴했고, 모든 학생들이 방학을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1월보다는 12월 초나 중순이 조금 더 저렴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중간에 잠깐의 휴식도 취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몇 시간의 여행도 할 수 있다면서 직항보다는 경유를 추천했다. 사실 직항과 경유는 금액 차이가 많이 났다. 저렴한 금액의 티켓이 나오면 바로 티켓을 예약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순이와 나는 겨울방학이 시작하면 바로 가기로 했다. 이왕 가는 거 제니도 겨울에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제니네 동네에서라도 오랫동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도 가장 저렴한 날짜로 구하기로 하고 일단락 지었다.


공부는 뒷전에 두고 정신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12개월 무이자는 없어서 첫 학기 등록금으로 받은 통장의 돈을 우선 비행기 티켓 값으로 먼저 쓰고, 그 금액을 12개월 동안 분할해서 넣기로 엄마와 약속을 했다. 나 혼자서 해도 될 일이었지만 혹시나 내가 힘들어지면 그 돈이 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서였다. 아빠는 무슨 해외여행이냐며 난리를 쳤지만 엄마는 자기가 벌어서 간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용돈도 주지 않으면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었다. 넉넉하게 뒷받침해 주지는 못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너라도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면 좋겠다고 엄마는 말했다. 캐나다에서 친구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니 밥 한 끼라도 꼭 네가 대접하라면서 만 원짜리 열 장을 봉투에 넣어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재미있게 잘 다녀와,라는 메모와 함께.


학교에서는 조교를, 저녁에는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그리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백화점에서 풀타임으로 판매직 근무를 했다. 돈이 조금씩 모이자 해외로 여행을 간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여행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도 이곳저곳 많이 찾아보지도 못했지만 제니가 있고 순이가 있으니 안심이었다. 그렇게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고 드디어 비행기는 떴다. 그 비행기 안에 내가 있었고 내 옆에는 순이가 있었다. 캐나다 공항에는 제니가 나와 있을 것이었다. 제니는 캐나다의 밴쿠버에 살았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에 하나라고 했다. 다운 타운에 나가면 한국말도 제법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다운 타운에 나갔을 때 진짜 외국에서 한국말이 들리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뭔가 이상하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2주간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3주 반으로 늘어났고 나머지 절반 동안 우리는 밴쿠버가 아닌 시애틀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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