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소소 76
아, 나가고 싶지 않다.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면서 잠만 자면 딱 좋겠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지윤이 기다리고 기대하던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걸 알기에 차마 약속을 취소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꼼지락거리기만 하고 있다. 목도 따끔거리고, 콧물도 나고, 몸도 좀 으슬으슬한 듯하다. 사실 몸은 아프지 않은데 괜히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핑계를 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몸까지 전달되는 거. 그런 거.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거야. 지난 몇 주 동안 주말에 계속 비가 내리고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봄기운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니다. 딱 봄이다. 해도 나고 따듯한 바람도 살랑거리고 있다. 나가면 기분이 좋아질 게 분명하다,라고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서로 바빠서 요즘 통 얼굴을 보지도 연락을 하지도 못했는데 지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고 만나러 나가는 중이었다. 지윤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우리는 간지럽게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는 아니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지윤이 요즘 빠져있는 성우가 있단다. (뜬금없이 성우라고?)
너도 목소리 들어보면 알 거야, 유명한 광고에 엄청 많이 나왔거든. (목소리가?) 외모도 준수하고 훤칠해. (역시 잘생겼구나?) 말도 위트 있게 굉장히 잘하고 예의도 바르더라. (방송에서 본 거지?) 내가 요즘 재밌게 하고 있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어. (게임에서 연기를 한다고?) 정말 멋있어서 자꾸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 사람이 정말 괜찮은 거야.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면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팬카페에 가입했어. (아이돌 따라다닐 때도 팬카페는 가입 안 했던 네가?) 거기 맨날 들어가는데 팬이 꽤 많고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 같아. (이젠 운영까지 눈에 보이는 거야?) 내가 성우 이쪽 세계는 처음이잖아.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게, 성우들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니까 몇몇 성우들이 모여서 낭독회 같은 걸 하더라고.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낭독회를 하는 거야?) 팬미팅도 하는데 팬들이랑 엄청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 멋있어. (팬카페가 있고 팬이 있으니까 잘 대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없고, 팬미팅 참석은 조금 무리다 싶어. (우리 나이가 몇이지?) 근데 있잖아, 조만간에 단독 낭독회를 할 예정이래!! (그래서?) 이렇게 성우가 단독으로 낭독회를 하는 건 드문 일인가 봐. (그만큼 대단한 성우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티켓팅이 엄청 치열할 것 같아. (티켓 사려고?) 내가 최선을 다해볼게. (응원해 줄까?) 같이 갈 거지? (뭐라고? 나 말이야?)
때마침 먼저 도착하신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고 통화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공부를 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 성우에 대해서. 성우님의 광고와 게임 캐릭터와 인터넷 방송과 사진과 기사와 기타 등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왔다. 유튜브가 유독 많았는데 게임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유명한(유명하다고 들은) 캐릭터를 목소리로 연기하는 영상이었다. 애니메이션의 부분 부분을 편집한 영상도 많았다. 하나도 모르는 게임 방송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틀어놓았다. 밤에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집중이 되지 않았는데도 성의를 보이기 위해 건성건성으로나마 보고 읽고 느꼈다. 목소리가 좋기는 하더라. 하지만 자꾸 들으니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 같고, 다른 성우들도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남자 성우의 목소리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생각만 했다.
지윤이는 참 좋은 친구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