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 나갔다.

by 빈둥

전 회장이 있을 때, 한 젊은 녀석이 농구할 때 매일 자기 슛만 쏘고 패스는 안했다. 같이 팀이 되면 그날은 공 많이 못잡는 날이었다. 녀석이 혼자 농구하니 힘이 쭉 빠졌다. 어느날 그 녀석이 경기가 끝나고 공도 정리 안하자 회장 형이 소리쳤다.

"너 새끼. 볼 정리 안해?"

녀석은 양말을 벗다가 어슬렁어슬렁 일어나서 공을 주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카톡방에 '직업 준비로 인해서 팀을 나가겠습니다.'라고 하곤 방을 나갔다.


회장이 젊은 회원들에게 막 대해서 젊은 친구들이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새 회장은 시스템적으로 팀의 기강을 바로잡고 싶어했다. 유니폼을 새로 맞췄고, 운동시간에 10분만 늦어도 보고하도록 했다. 팀장을 정해서 드래프트 방식으로 사람을 뽑아갔다. 경기 시작 전 20분동안 레이업 슛, 점프슛 등 몸풀기를 하고 경기에 들어갔다.


하필 오늘 나는 지각을 했다. 민망하게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중이라 나는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얼른 연습하는 줄에 합류했다. 하필 회장이 내 앞에 있었는데, 평소에 지각을 안하고 일찍 와서 그런지 별 말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 회장과 나는 한 팀이었다. 두 배로 눈치가 보이는 상황.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R이 왠일로 먼저 도착해 있었다. 188CM의 큰 키에 옅은 갈색의 섬세한 눈동자. 곰보자국이 있어 피부가 좀 안 좋긴 했지만, 이국적인 인상의 녀석은 상중하 중에 중상 정도는 되보였지만, 말만 하면 감정적인 게 뚝뚝 묻어났다. 특히, 아픈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질 못했다. 내가 발목이 아파서 못 뛰겠다고 하자 옆에서 누군가 비아냥 거리니까 R이 말했다. '형 진짜 아파. 몰라서 그래. 쉬게 해줘.' 이런 따뜻한 말들 때문에 R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농구 코트 위에만 올라가면 R은 변했다. 감정적인 특징이 코트 위에서는 흥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문제는 하필 그날 회장의 상대가 R이란 거였다. 게임을 하는데 중간에 회장 형이 심판에게 항의를 했다.

"심판, 얘가 자꾸 밀어요. 이거 공격자 파울 아냐?"

공격할 때 수비자를 밀면 파울이다. 정당한 몸싸움과 구분이 정확히 안 되는 조금 애매한 문제긴 하다.

"형 이게 뭐 파울이야? 자리 잡은 건데. 자리 잡은 게 뭐가 문제야. 형은 이렇게 안해?"

10살 많은 형한테 계속 그러니까 형이 짜증이 났는지 폭발했다.

"그만 좀 하라고! 시파 항의는 심판한테 항의하라고. 조깠네 진짜.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체육관이 쩌렁쩌렁 울렸다. 상황을 모르던 사람들은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나 역시 놀라서 쳐다보는데, 금방까지 깐죽거리던 R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둘이 눈을 마주치게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나도 말을 보탰다.

"항의 하지 마. 너 평소에 항의가 너무 많아."

하지만 폭발한 뒤로 회장의 분노는 멈추질 않았다. 녀석에게 다가가며 가슴을 내밀었다. 나도 얼른 가서 R의 앞을 막아섰다. 회장은 대거리를 하며 욕을 했다.

"야, 내가 지금 한 두 번 이래서 그러는거 같아? 해도 해도 너무하니까 그러지 임마."

회장이 위협적으로 나오자 상대팀은 R을 코트에서 나오라고 했다. 화가 난 R은 가방을 싸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곧 카톡방에 글이 올라왔다.


본의 아니게 분위기 망쳐서 죄송합니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이 과했나 봅니다. 형 동생분들에게 인사못하고 나가는점 죄송하고 다치지 마시고 즐겁게 운동하시길 바랍니다.

-R님이 나갔습니다.


회장은 전부터 쌓였던 게 있었다면서, 잘못해 놓고서 혼 좀 났다고 말도 안하고 집에 가고 탈퇴하는 사람은 잡을 마음 추호도 없다고, 붙잡지 말라고 단속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사단이 일어난 걸까?


첫째로는 R의 실력이 문제였다. R은 평소 흥분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기름손이라 주는 공을 자주 놓치고, 못하는 주제에 형들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대 팀이 높고 빠른데 맨투맨 수비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 때문에 40살 먹은 형들이 몸도 안풀린 채로 대인 방어를 하며 죽자사자 뛰어 다녔다. 쉬는 시간에는 어린 애를 불러 '너는 이때 나한테 패스 했어야지. 왜 그걸 못 봐?' 라면서 비난했다. 회장으로서 이런 소식들이 귀에 들어오는게 한, 두 번이 아니었을 터. 스스로 쌓아온 대가를 치른 건 아닐까.


둘째로는 세대차이다. 화를 낸 회장 형은 40대 초반. 혼을 받은 녀석은 30대 초반. 10년의 차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40대 형들은 윗사람들과 대화할 때, 기본적으로 상하 관계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30대 중반까지 친구들은 수평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40대 형들이 봤을때 해선 안되는 불만도 빼놓지 않고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불만을 얘기하는 걸 형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팀이나 그렇듯이 떠나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2년 간 만나면서 조금씩 알게 된 파편적인 기억들이 R을 떠나보내는 걸 어렵게 했다.


하나, 한 번은 R의 차를 얻어탄 적이 있다. 그의 차 중앙에는 슬램덩크 강백호와 서태웅의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방에도 강백호와 서태웅 키링이 늘 있었다.

하나, R은 늘 농구하기 전날에 술을 먹고 온다. 만나면 '어제 누구랑 먹었냐?' 가 인사가 될 만큼. 나는 진심으로 건강이 걱정되서 물었다.

'너는 도대체 왜 맨날 술을 먹냐?'

'아 그때밖에 시간이 안 돼요. 퇴근하면 열시라서.'

'뭐? 맨날 그렇게 야근해? 진짜 맨날?'

'어.'

'너 그럼 취미생활은. 다른 거 안 해?'

'못해. 형. 그럴 시간이 어딨어.'

10시까지 뭘 하면서 야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유튜브를 실컷 보든, 뭘하든지 여튼, 학원을 다니거나 농구장에 나갈 시간은 없는 건 확실하겠다. 나는 요즘 요가를 시작해서 몸이 유연해졌고, 헬스를 하면서 근력이 좀 늘었다. 시간도 있고 돈도 조금 있다.

하나, R은 작년에 결혼했고, 결혼식을 한 지 얼마 안되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하나, 지난번에는 코트 앞에서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아니, 아빠 도대체 왜 그래? 아니 그거 건들지 말고.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내가 갈게.' 그렇게 강백호 키링을 휘날리며 R은 코트를 떠났다. R이 그렇게 좋아하는 농구를 코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갔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과연 나처럼 '그냥 담에 하지 뭐'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을 수 있을까?


R을 비난하자면 끝이 없을 거다. 못 배우고 모르면서 형들 생각도 안하고 저렇게 지적질을 해대는 개념없는 놈. 유튜브에서 본 것만 갖고 다 안다고 착각하는 꼰대같은 놈.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같은 팀을 하면, 어린 꼰대를 만나는 거 같아서 싫고 R이 '형 이번에 맨투맨 좀 해보자'고 하면 짜증이 난다. '형 이쪽으로 수비 좀 더 해줘.' 라고 하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확 찔러버리고 싶다. 근데, 나는 그냥 R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팀이라 부침도 많다. 취업준비생,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애 둘 아빠, 애 셋 아빠 등등 각자의 나이와 농구 경험, 처한 상황도 달라서 우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채로 코트 위에서 만났다.

인생이라는 코트에서는 마음껏 풀리지 않아서, 농구 코트에서만은 뭔가 펼쳐보려는 이들을 보면 두 번 속이 쓰리다. 하나는 그들의 잘 안풀리는 인생이 안타까워서. 하나는, 그 친구와 같은 편을 하면 재미없어서.


무엇보다 배려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욕심을 부리고, 그들이 팀 분위기를 흐린다. 그들은 코트 위에 땀 말고 무엇을 흘리는가. 그들의 욕심에 삶의 궤도가 묻어난다. 나는 그들을 미워함과 동시에 미워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롭다.


R에게 커피 한잔을 기프티콘으로 보냈다.


R: 아니, 형 왠일이야. 이게.


나: 힘내라. 우리 팀의 강백호. 이 일도 잘 이겨내면 좋겠어.


R: 형 내 멘탈은 농구랑 안 맞나 봐. 기회 되면 봐.


그게 R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R이 조금만 성숙한 상태로 팀으로 다시 들어오면 좋겠다는 약간의 욕심이 있지만 어쩌랴. 인생은 다 제각각인걸. R의 농구인생을 더 지켜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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